우리는 어디로 진화하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진화하는 걸까
최근에는 ‘뭔가 잘못됐어도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못됐느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만 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러니까 뭔가 아주 단단히 잘못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는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잘못된 것 같은 느낌만 든다는 점에 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맞는데 그 뭔가가 뭔지를 모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누가 나서서 내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이러이러한 게 잘못되었다’고. 아니면 내가 잘하고 못하고 가 눈에 보였으면 좋겠다. 디지몬의 진화처럼 말이다.
디지몬은 포켓몬과 달리 정해진 진화 루트가 없다. 피카츄는 반드시 라이츄로 진화하지만 아구몬의 경우 꼭 그레이몬으로 진화하라는 법은 없다.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 그레이몬이 될 수도 다른 디지몬이 될 수도 있다. 이 진화에는 올바른 진화도 그릇된 진화도 없다. 편의상 규칙적인 진화와 불규칙적인 진화로 나누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잘 되거나 잘못되거나 하는 개념은 아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없다는 거지 키우는 입장에서는 잘 된 진화와 잘못된 진화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내 디지몬이 이렇게 진화했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이 있을 테니까.
99년도 판 <디지몬 어드벤처>에서는 태일이의 파트너 디지몬인 아구몬이 스컬 그레이몬으로 암흑 진화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데블몬과의 사투 후 일행 앞에 새로 나타난 강력한 적 에테몬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며 아구몬에게 한 단계 높은 진화를 강요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스컬그레이몬으로 암흑 진화한 아구몬은 이성을 잃고 날뛰다가 이내 모든 힘을 소진하고 유년기인 코로몬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동안 태일은 자신이 진화를 강요했다는 아구몬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아구몬이 또 암흑 진화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아구몬을 진화시키기 못하게 된다. 그러다 용기의 문장을 각성하고 아구몬을 향한 믿음과 진화에 대한 용기를 각성한 끝에 올바른 초 진화를 이룩, 아구몬을 메탈그레이몬으로 초 진화시켜 에테몬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다.
메탈그레이몬과 스컬그레이몬, 모두 아구몬이 진화한 디지몬이지만 태일이 바라는 모습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스컬그레이몬이 아니라 올바른 마음으로 디지털 월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메탈그레이몬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구몬이 스컬그레이몬으로 진화했을 때 태일은 낙담했을 것이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구몬의 진화를 통해 태일은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확실히 알게 되고 무엇이 그 잘못된 결과가 무엇인지까지 알 게 된다. 진화가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진화하는 존재다. 옳은 방향이든 옳지 않은 방향이든 더 발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화는 디지몬의 진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나중에 시간이 흘렀을 때‘내가 잘했구나’ 혹은 ‘그렇게 해선 안됐구나’하고 깨달을 수밖에 없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게 단지 느낌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짜 잘못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 걸까.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어떤 진화를 바라고 있는 걸까. 누가 좀 말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