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누 Jun 28. 2021

디지몬 -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넌 나의 박동을 먹고 자라나

넌 나의 박동을 먹고 자라나


바이탈 브레스를 샀다. 그게 뭐냐면 바이탈 브레스 디지털 몬스터라는 이름의 시계다. 그러니까 시계처럼 생긴 디지몬 다마고치다. 어렸을 때 하던 디지몬 게임기가 시계 형태로 나왔다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사람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나는 이것을 ‘디지몬 워치’라고 부른다. 그냥 가만히 보면 꼭 못생긴 스마트 워치처럼 생겨서 그렇다.


디지몬 워치는 본질은 다마고치지만 스마트 워치 콘셉트를 표방하여 ‘바이탈 브레스’라는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따로 밥을 줄 필요가 없다. 배변을 치워줄 일도 없다.  그냥 손목에 차고만 있으면 된다. 그럼 디지몬 워치가 내 맥박을 체크하고 내가 움직이는 만큼 디지몬이 자란다. 내 활력 징후가 곧 내가 키우는 디지몬의 먹이가 된다. 디지몬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몸을 움직여야 디지몬이 자라니까 나는 한 번씩 괜히 손목을 움직인다.


손목에 차고 다니기만 하면 되니까 엄청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 손목에 차고 있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맥박이 확인되지 않거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디지몬의 바이탈 수치가 떨어지고 오랜 시간 차고 있지 않으면 디지몬이 사망한다. 즉 손목에 차고 있으면 디지몬이 자란다기보다 손목에 차고 있지 않으면 디지몬이 죽는 것에 가깝다.


디지몬은 개체에 따라 오후 8시에서 10시 정각에 잠에 드는데 자는 동안에는 내 박동이 필요하지 않다. 비교적 활동적인 디지몬은 8시에 일찍 잠에 들고 조용한 디지몬은 10시는 되어야 잠든다. 디지몬은 꼬박 12시간을 잔다. 8시에 자는 디지몬은 8시에 일어나고 9시에 자는 디지몬은 9시에 일어난다. 절대 덜 자거나 더 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디지몬이 깨기 전에 디지몬 워치를 손목에 차야 하고 디지몬이 잠들면 그때서야 디지몬 워치를 풀 수 있다. 충전도 디지몬이 잠든 이후에나 할 수 있다. 충전을 하려면 시계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그건 그냥 족쇄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 뭔가를 키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작은 도트의 가상 생명체이지만 어쨌든 생명은 생명이다.


디지몬 워치의 본질은 장난감이다. 때문에 간단한 운동 미션을 통해 디지몬을 훈련시키거나 NFC를 통한 디지몬 배틀을 하며 가지고 놀 수도 있지만 시계 속 디지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내 박동뿐이다.  내 박동이 없다면 디지몬은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사망할 것이다. 나는 시계 속 디지몬이 살 수 있게 손목에 디지몬 워치를 찬다. 그게 내가 하는 전부다. 조그마한 화면에서 디지몬은 잘도 살아있다. 꼭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내 박동을 먹고 자란다.


전날 새벽 늦게 잠들거나 하는 등 도저히 디지몬이 깨어나는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을 때는 그냥 시계를 꺼버린다. 시계를 끄면 디지몬의 시간이 멈춘다. 그동안은 진화 타이머도 흐르지 않는다. 뭐하는 지도 알 수 없게 화면도 꺼져있다. 전원을 다시 켜면 다시 날짜를 설정하고 시간을 맞춘다. 그럼 잠들어 있는 디지몬이 다시 나온다. 시계가 꺼진 동안 디지몬은 어쩌면 필사적으로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디지몬 워치에는 리셋 기능이 있다. 리셋을 하면 시계 속 디지몬도 사라지고 지금까지 키웠던 기록들도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한 번은 앱 연결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시계를 리셋시켜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아쉬움을 참고 리셋 버튼을 누르자 ‘리셋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 창이 떴다. 선택 버튼을 누르자 디지몬 워치가 리셋됐다. 그리고 키우던 디지몬이 사라졌다. ‘리셋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과연 누가 했던 걸까.


이전 04화 디지몬 -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