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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Jul 09. 2021

우리만 아는 슬픔들 <6>

save me

Save me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종교에서 말하는 죄를 사함이 아니라 절망감 등의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구원은 셀프라는 건 결국 그러한 마음에서 자신을 꺼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우리를 구할 수는 있지만 구원은 셀프로 할 수 없다.


물론 구원이라는 것이 타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에는 약간의 체념이 섞여있다. 타인에게서 구원을 찾고 찾고 또 찾다가 결국 찾아내지 못해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은 '스스로 할 수 있다’ 보다는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구원은 나 자신에게도 없는 것 같다.


그럼 구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구원은 내가 아닌 것에 있다고 믿는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내가 아닌 것들이다. 그건 타인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혹은 미래의 내가 될 수도 있고 비인간 동물일 수도 있고 생물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것들에 잠시 마나 구해진다.


셀프라는 체념은 누구도 나를 구할 수 없다는 체념임과 동시에 나 역시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포기 선언 같다. 구원을 셀프라고 선언하는 순간 나는 그 무엇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손을 뻗을 수 없게 된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 돼버린다. 구하려면 구해지기를 바라야 하고 구해지려면 구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절대적 구원자는 될 수 없다. 최대한 포기하지 말고 질척거려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은 셀프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건 내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수렁에 빠진 내가 아닌 무엇인가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랄 것이라는 말이고 끝내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손을 뻗고 나와 상관있는 일처럼 여길 거라는 말이다.


우리는 유한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원은 기껏해야 아주 잠깐의 구원일 것이다. 끝내 수렁에서 꺼내 주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해서 손을 뻗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구원은 셀프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를 구해내고자 다짐한다면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당신을 물에 뜨게 할 튜브가 되어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원은 이 정도로 작은 튜브 같은 것이다. 아니면 페트병이나. 119를 부르는 손가락이나.


우리는 그렇게 수렁에서 구해졌다가 구했다가 또 수렁으로 빠질 것이다. 끊임없이 손을 뻗고 다른 누군가에게 혹은 지난날의 나에게, 미래의 나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자. 누군가는 지나갈 테고 또 누군가는 손을 뻗어줄 테니까. 부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손을 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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