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록

단시엘W.모니즈<우유,피,열>, 멜라니 보니스<Allegretto..>

by 새로운 고전

어떤 화해의 기록들은 끈적하고 후덥지근합니다.

아니 많은 화해의 기록들은,

말끔하고 후련하기보다 모호하고 끈적거리는 해결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미없는 고통에의 의문은 없다고 이 소설은 말합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후덥지근하다 못해 뜨거운 감각과

스물스물 피어나는 안개 같은 뭉클함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느꼈던, 혹은 앞으로 느낄 수 있는

모호하고 불가해한 감정들이 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에바는 자신이 진짜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이 몸을 입고 있으면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낯설다.

열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공허가

짊어질 만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공허는 대체 누가 거기에 넣은 것일까?

때로는 공허로부터 기어이,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을 절대 반납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공허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니까.'




'여기서 바라본 엄마는 어려보인다.

저녁 식사에 참석한 어떤 여학생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엄마는 분명 세상이 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프랭키의 모습이 갑자기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두려움 가득한 별개의 존재.

나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엄마에게도 지구상에서 처음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마고는 문득 깨닫는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우유, 피, 열>은 11개의 단편으로 묶인 작가 단시엘W. 모니즈의 데뷔작입니다.

붉고 하얀 색감, 끈끈한 에너지, 퀴퀴하고 야릇한 냄새 등

우리의 다양한 감각을 건드리는 기이한 읽기 경험을 건넵니다.

문장들은 강렬하고 섬세하지만 때로 이야기의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이 유색인이라는 사실, 이민자라는 사실이나 아이를 유산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사건의 원인이나 인물이 한 행동을 끝내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가 은유하고 있는 미국 사회 속 흑인 여자아이의 삶의 층위들을 읽습니다.




'"옥상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에바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스쳐간다.

공기가 거세게 밀려나고, 뼈가 부러지고, 덩어리들이 시뻘겋게 철퍼덕.

끔찍해.

키라에게 이 말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데

눈앞에는 그 흉측한 건물들 뒤로 파랗게 펼쳐진 하늘뿐이다.

진정한 신의 파랑.'




'우리 제이 양은 경건한 사람인가요?

제이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자 목사는 제이에게 여자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순종하고, 독실하며, 정결하게 구는 일 같은 것들.

그러고는 이브의 역사에 대해 되짚으며,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남편을 꼬드기는 바람에

세상이 이브의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자가 자기 분수를 몰랐던 탓에 인류가 불행과 파멸로 향하게 된 거라고.'



'제이의 엄마는 여자가 되는 법을 여기서, 믿음으로 배웠고,

아빠는 남자가 되는 법을 배웠지만

제이는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노예선, 마녀재판, 맨발의 여자들에 대한 진짜 역사를 찾아봤다.

빌린 책마다 임금 격차, 협상 한계선 같은 단어들로 가득해서,

제이는 문학이 됐든 자서전이 됐든 장르를 막론하고

페이지마다 얼룩진 남자들의 분노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짓말을 흰 씨앗처럼 심고 있음을 눈치챘다.'




지난 다섯 개의 편지에서 소개드린 작곡가, 연주자들의 성별은 모두 남성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소개드릴 고전들의 창작자의 성별 또한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여성 작곡가들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 함께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고민과 조심스러움이 제 머릿속을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음악학자들이 음악사에서 의도적으로 여성을 다루지 않았고

여성은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비창조적이라는 주장이 생겨났으며,

한 유명 지휘자는 '여자가 있을 곳은 교향악단이 아니라 주방이다'라고 얘기하고

여성이 작곡가를 직업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부자연스러운 시대에서 걸어나와

보다 다양하고 훌륭한 창작물을 폭 넓게 소개하는 일은 의식적이라고 느낄 수 있으며

아주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그럼에도 이 강렬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이름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멜라니 보니스(Melanie Bonis)입니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부모가 음악교육을 반대해 독학으로 피아노를 쳤습니다.

여성은 작곡처럼 창조적이고 논리를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의 시대에

직업 작곡가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녀는 멜라니라는 이름 대신

멜 보니스(Mel Bonis)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합창곡과 실내곡들, 11개의 오케스트라 등 약 300여곡을 남겼는데

가곡과 피아노 솔로 곡이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아기가 '언니 인생을 어지럽힐까 봐'

겁이라도 난다는 거야? 이기적인 생각 아냐?"

빌리 자신도 그렇지만 아직 아기나 마찬가지인 동생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말이야 쉽지,

너는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 있고

쌓아야 할 경력이 많다는 설명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시간은 얼마든지 더 있다고, 당연히 시간은 있는 거라고

스스로 되뇌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성가신 존재일 수 있었고,

살갗의 아주 간단한 흉터도 이제 더는 사라지지 않는 나이였다.

빌리는 이 아기가 자신을 부숴버릴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이유들이 참일 수 있으며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끼어든 혼란 뒤에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엄마가 되는 일이 어떤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머니에 돌 하나를 더 집어넣는 일과도 같다는 설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기는 훗날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도리어 내가 망가뜨린다면?

물론 모두가 엄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의미로는 더더욱 아니다.

만일 여자들에게 궁금해할 자유가 더 많이 허락되었다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그 중에서 소개드릴 곡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알레그레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9Afi1KB8pc


낭만주의의 향이 나는 피아노 아르페지오로 시작됩니다.

우아한 바이올린 선율 아래에서 조금씩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피아노의 화성을 함께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계속될 것처럼 흐르던 물결이 피아노의 메조스타카토 음형을 시작으로 변화하며

보다 깊고 신비로운 선율로 확장됩니다.

따뜻하고 날카로운 두 사람의 대화 같기도 합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홀린 채 그들 속에 섞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엄마에서 딸로 그리고 다시 엄마로,

시간의 중심부로부터 뻗어 나와 끊어진 적 없이 젖과 피로 이어진 사슬 속에서

서로를 잇는 고리라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단시엘W. 모니즈는 '예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지 않고

여전히 느끼고 배우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궁극적 신뢰'라고 말했습니다.

종종 고전의 역사는 힘에 의해 선택된 기록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훌륭한 예술들, 서양 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넓은 세계의 음악들.

선택되지 못했어도 아름다운 소설과 음악들을 찾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술을 읽는 과정에서 배우고 넓어지고 유연해지는 우리들의 인간다움을 기대하며 전합니다.







*참고

단시엘W.모니즈 <우유, 피, 열>, 모모, 2023

Mel Bonis (멜라니 보니스), 'Allegretto' for violin and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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