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린드그렌<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진은숙<권두곡>
말 한마리도 들어올릴 수 있는 괴력을 자랑하고
뒤죽박죽 별장이라 불리는 곳에 혼자 살고 있으며
온 세계의 멋지고 신기한 조개껍데기와 돌들을 모으고
자유로운 패션과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소녀가 있습니다.
지겨운 걸 싫어하는 대신 어디서든 재미있는 걸 발견합니다.
"내가 걸을 때마다 나는 소리 좀 들어 봐.
옷에서는 '서걱서걱' 소리가 나고
구두에서는 '철퍽철퍽' 소리가 나지?
재미있지 않니?
너도 한번 해 봐."
친화력이 뛰어나지만 이렇게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난 개미들하고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서 같이 앉고 싶지 않아."
그리고 좀처럼 낙담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건 어려울까?"
바위 아래는 가파른 비탈길이었고,
땅바닥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삐삐가 계속 말했다.
"사람은 날아서 내려가는 것 정도는 배워야 해.
날아서 올라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쉬운 것부터 해보는 게 좋아.
그래. 한번 해 볼래."
토미와 아니카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삐삐.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삐삐는 이미 바위 끝에 서 있었다.
"날아, 날아, 날파리. 날아, 날아, 날았다!"
삐삐는 '날았다!'고 말한 순간 팔을 들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곧이어 '쿵!' 소리가 났다.
땅에 부딪친 것이다.
토미와 아니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위에 엎드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삐삐는 발딱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더니 거침없이 말했다.
"날갯짓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그리고 배 속에 팬케이크가 너무 많이 들어 있었나 봐."
소설이 인물과 이야기와 상상력의 세계라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비 롱스타킹>은 제게
매력적인 인물과 상상이 담긴 멋진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들릴 것 같은,
정확히는 삐삐의 세계에서 들릴 것만 같은 소리를 상상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895zIe7KYo&list=WL&index=5
배경설명 없이 이 소리들을 먼저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무슨 색이 떠오르는지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지
이 곡을 듣는 삐삐는 어떤 표정과 몸짓을 지을지
상상하면서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제가 이 음악을 '소리들'이라 칭한 이유는 이 곡의 어법이
우리가 평소 알던 조성음악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로 현대음악이라 칭하는 이 음악은 그 시기의 구분은 모호하지만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잇는 순수음악을 부를 때 주로 사용됩니다.
다양한 기법과 양식, 실험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필립 글래스나 스티브 라이히, 한스짐머 등의 이름을 들어보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이 곡의 제목은 '권두곡', 작곡가는 한국의 진은숙 작곡가입니다.
'권두'는 책의 앞머리에 등장하는 삽화(머리그림)를 뜻합니다.
윤이상 작곡가 이후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진 작곡가라는 것과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인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다는 것
이 작곡가가 가진 명성과 영향력을 차치하고라도
들을 수록 이 곡의 소리들을 애정하게 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심과 자유로움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국적이 없는 꿈과 역동적인 에너지로 반짝반짝 빛납니다.
"거봐! 발견가만큼 멋진 직업이 없다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발견가가 되지 않다니, 참 이상해.
다들 재단사나 구두장이, 굴뚝 청소부는 되면서도 발견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발견가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나 봐!"
제가 느끼는 진은숙의 음악과 삐삐의 공통점은 상상력과 생동감입니다.
늘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 반짝거리는 눈과
확실한 자기 세계를 표현하는 일.
진은숙 작곡가는 매 순간 실패를 딛고 다시 쓴다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천사이고 아빠는 식이종 섬의 왕이라 생각하며 사는 삐삐에게도
크고 작은 고난들은 있습니다.
글자를 몰라 친구 생일카드를 밤새 고쳐가며 써야 하고,
얌전히 있지 못할 거라며 다시는 오지 말라며 다과회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진은숙의 작품들이 특별한 이유는 ....
그가 사용하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표현 방식에 있다.
그의 음악은 모호함과 상상력의 여지를 주며,
구조적인 정교함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력,
안정감과 유동성,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함과
깊은 곳에 자리한 신비로움 사이의 조화를 이룬다.'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 소개 문구 중
"너무 믿지 마. 노력은 하겠지만 말이야.
내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다들 나더러 버릇이 없다고 해.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바다에서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너희가 나 때문에 창피당하지 않게 애써 볼게."
그렇지만 삐삐는 친구들(토미와 아니카)의 존재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낭비하지 않는다면 부족하지도 않을거라 말하고
친구들과 셋이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고
토미와 아니카의 부모님이 오셔서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그들이 돌아가는 등 뒤에 대고 크게 외칩니다.
"난 커서 해적이 될 거야. 너희는?"
*참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시공주니어, 1996
진은숙, <권두곡>,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