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랑이 다 이런 결말인 거라면
민음사에서 출판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좋아한다.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등 들으면 알만한 수작이 포진해있기도 하거니와, 그들 중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읽어도 웬만하면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정대건 작가의 '급류' 역시 2022년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됐던 작품이다. 다만 기존의 책들과 다른 점은 출간 후 약 2년이 지난 시점부터 SNS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역주행하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다. 챗GPT에게 물어보니 2024년 말에 한 인플루언서가 '급류'를 읽고 우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이 영상이 무려 200만 뷰를 돌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어떤 점이 그리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던 걸까.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결국 답은 '사랑'이다.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나에게 '급류'는 오랜만에 만난 정통 멜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도담과 해솔이 10대에 만나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고, 이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극을 함께 겪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상처받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 독자는 그들이 30대가 되어 재회할 때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함께 지켜보게 된다. 물론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과 감정은 분명 극적이다. 책을 읽으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양과 완벽히 일치하진 않아도,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읽는 이들 역시 본인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해솔은 그런 반짝이는 눈을 할 때가 많았다. 언덕에서 반딧불을 처음 봤을 때, 별들이 쏟아질 듯한 진평의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발견을 한 듯한 눈을 했다." (p.52)
도담이 해솔과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다. 늘 보았던 무심한 풍경이 새롭게 느껴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일. 누군가가 실제보다 더 멋져보이고 예뻐보이는 일. 혹자는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고 했던가. 사랑에 빠져봤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몸은 도대체 어떻게 설계되어 있길래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싶지만-분명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분명 겪어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시점에서 경험한 놀라운 순간들에 중독되고, 이 기현상이 영원하길 바란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4)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랑에 베이게 된다. 사그라지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강제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때 즈음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고, 모두 다른 사랑을 하기 때문에 확언할 수는 없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동일한-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도담은 사랑에 '빠졌고'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다. 한 번 빠지면 아무리 버둥거려도 몸이 제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거세지고 빨라진 물살에 휩쓸려버리고 나면 그 때부턴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물이 잠잠해지고 몸이 자연스레 떠오를 때까지.
"사랑이란 건 거대한 마케팅 같아요. 제가 보기엔 잘 포장된 욕망과 이기심인데. 자기들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고. 그게 장사가 되니까요. 사과 로고처럼."
"맞아요.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 '타이타닉'도 결국에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정도로 도취되었던 거 아닌가요? 그 둘이 살아남았으면 결국 '레볼루셔너리 로드'처럼 진절머리 나는 결혼 생활을 했을 걸요." (p.199)
이 부분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피식댔던 것을 떠올리면 나 역시 도담과 승주처럼 '냉소 클럽'이라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더이상 사랑의 환상과 영원함을 믿지 않는 단계로 넘어온 것 같으니 말이다. 'happily ever after'가 전형적인 클리셰처럼 느껴진 게 어느 시점부터였더라. 세상엔 아직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태반이지만 도담이 말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처럼 사랑의 한계를 다루는 작품도 많지 않은가. 나의 환상을 깨준 첫번째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를 포함해 '결혼 이야기', '클로저', 곧 개봉할 '디어 마이 러브'처럼. 사실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운명을 믿는다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마음 한 구석으로는 믿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더욱 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어려워진다. 설렘과 끌림, 다정함과 편안함, 이어져 있다는 느낌, 믿음, 배려, 희생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존재하지만 이 많은 것들이 모두 양립할 수는 없기에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을 사랑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같이 의심이 많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나이를 더 먹고 할머니가 되어도 단박에 사랑은 이런 거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놈의 사랑이 비록 환상일 지라도 여전히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은 사랑이다. 매일 사랑 노래를 듣고, 사랑 이야기를 읽고,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있을 테니. 환상도 매일같이 믿다보면 어느 순간 현실이 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사랑에 한 스푼 더 기대를 걸어본다.
"도담 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 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