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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May 04. 2023

01. 넘어진 자전거

나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어린 내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뛰어가면 10분 안팎으로 도착하는, 주변에 논밭이 펼쳐진 정겨운 곳이었다.  



학교 가는 길은 이랬다.

집에서 나와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왼쪽 한번, 오른쪽 한번 꺾어서 큰 도로가 보이는 쪽을 향해 걷다 보면 경사가 35도쯤 되는 언덕길을 만난다.

왼쪽으로는 폭이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도랑으로 물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큰 도로와 이어지는 둑이 내 키의 열 배쯤 되는 높이로 서 있었다. (어릴 때라 그 둑이 더 높아 보였다)

그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도랑의 왼쪽에는 논밭이 있었고, 그 논밭에 댈 거름더미들이 초봄의 싱그러운 공기를 어지럽혔다.

아무리 코를 막아도 그 냄새는 콧구멍을 공격하듯 찔러댔다.



언덕길을 올라 큰 도로를 건너 학교에 갈 수도 있고, 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학교에 갈 수도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주로 굴다리를 지나갔다.

부모님들이 큰 도로로 다니지 말라고 했는지, 그저 언덕을 오르는 일이 힘들어서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짧은 다리로 언덕을 오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오르기 어려운 그 언덕길이 반가울 때가 있었는데, 반대로 내려갈 때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나게 내달릴 수 있는 내리막길이 더 반가웠다.

가속도가 붙어 더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그 내리막길이 반가울 때가 있었는데,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였다.



요즘 아이들은 자전거를 배울 때, 엄마나 아빠가 뒤에서 잡아준다.

부모는 안심하고 달리는 아이 몰래 손을 놓고는 혼자서도 잘 달리는 아이를 있는 힘껏 응원해 준다.

아이는 안심하고 달리다가 문득 부모가 옆에 와서 함께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한다.     



여덟, 아홉 살 때쯤 나는 동네 친구, 오빠, 언니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자상한 부모님처럼 뒤에서 잡아주고 응원해 주고 그런 건 없다.

우린 자전거를 끌고 등굣길의 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 사람씩 그 언덕에서 출발하는 거다.

잘 타든 못 타든 일단 ‘출발!’하면 달리기 시작했다.



중심도 겨우 잡던 나는 언덕 위에서 출발한 자전거가 나를 싣고 하늘을 나는 줄 알았다.

얼핏 오른쪽으로 거름더미도 보였다.

저기 꼬라박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손잡이를 왼쪽으로 틀었다.

자전거와 함께 시멘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릎에는 피가 철철 흘렀지만, 그건 영광의 상처였다.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질까 하는 두려움 따위는 사라졌으니까.

언니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도랑으로 떨어져 빠진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전거를 못 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지막지하게 그러나 단번에 상처와 함께 배운 자전거 타는 방법은 문신처럼 내 몸에 새겨졌다.   


  




29살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던 때는 마치 하굣길의 그 언덕길을 내달릴 때 같았다.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기분.

그게 내리막길이란 것도 모르고.


 

오른쪽엔 거름더미가 있고, 더 가면 도랑으로 빠질 수도 있는 길이었는데, 당시엔 그저 힘들지 않고 달려 집으로 갈 수 있으니 즐거운 길이라 여겼던 아이의 마음 같았다.

남편에게 빚이 있다는 걸 한 번, 두 번 알았을 때는 그래도 해결할 만했다.

그것만 해결되고 나면 다시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처럼 수월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빚이 억 단위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거름더미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랑에 빠졌는데, 무릎과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쳐 깨진 것만 같았다.     



자전거를 배울 때는 무릎이 까지고 피가 철철 흘러도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러나 억 단위의 빚이 나를 내리쳤을 때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결혼생활이라는 이 자전거 위에 다시 올라타고 달릴 수 있을지, 이 자전거가 나를 어딘가에 또다시 처박지는 않을지, 내동댕이치진 않을지 무서웠다.



무엇보다 함께 탄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가슴 아팠다.

어딘가에 숨겨진 빚이 또 있으면?

이걸 해결했는데 네 번째 또 같은 일이 반복되면?

이 커다랗고 무서운 데다 한 번도 구경해 본 적 없는 돈을 무슨 수로 갚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자전거 위에 다시 탈 수 있을지 확신조차 없는 내게, 시댁 식구들이 던진 말들은 고민을 결심으로 돌아서게 했다.



”손 내밀 생각하지 말아라. 한 푼도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






자전거를 배울 때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는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넘어지고 깨지며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내 몸뚱어리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랬던 내게, 그 말들은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켰다.

도와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먼저 선을 긋고 나서는 그분들의 말에 다시 자전거에 올라탈 의지마저 꺾여버렸다.     



짐을 싸 들고, 아이 둘과 함께 KTX에 몸을 실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거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두 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부모님께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잘살고 있다고 믿어온 딸의 어려움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잘 키웠다고 믿어온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흐뭇한 표정으로 두 분의 일상을 살아가시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 일상을 깨러 가는 길이었다.

참담했다.

기차를 탔다며 좋아하는 두 아이를 보며 미안했다.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을 맞은 내게 날아든 차가운 말들에 화가 났다.



어디선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아니 온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자전거를 배울 때는 '내일 또 타야지, 내일은 더 잘 탈 수 있을 거야.'라며 깨진 무르팍을 보면서 희망을 품었었다.

‘아프지만 재밌네.’라며 중독성 강한 그 놀이에 흠뻑 빠졌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안전하고 빠르고 거름더미에 나를 내던질 일도 없는 KTX를 탄 내 마음은 암흑이었다.

내일이라는 말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돌이 갓 지난 둘째를 안고, 이제 겨우 4살 된 첫째의 손을 잡고, 나는 보이지 않는 내일이라는 시간 속을 걸어가야만 했지만, 그 시간이 내게 닥칠까 두렵기도 했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상처는 화살이라고 하셨다.

상처를 견뎌낸 사람은 언젠가 상처가 만들어낸 단단함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내 몸에 새겨진 상처는 독이었다.

점점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걸 무기로 쓰기에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무릎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흐르는 피로 공황 상태였다.

단단하지 않은 몸과 마음에 생긴 상처는 독이 되어 전신을 마비시키고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다.

알았다 한들 당시엔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드라마 퀸메이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연어는 아주 못된 습성이 있지. 그저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내려가서 적당한 자리에서 분수에 맞게 한철 보내면 되는데, 굳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을 낳고 죽잖니? "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내맡기면 편하게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무르팍이 갈리고 피가 흘러도 다시 자전거를 끌고 언덕 위를 올라갔던 나의 어린 자아는 속삭였다.

그건 네가 아니라고. 못된 습성. 그게 너다운 거라고.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우리가 이 문명사회에서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네. 다만, 잊지 말게나 우리가 죽은 물고기가 아니란 걸 말이야."        



나는 죽은 물고기가 될 수 없었다.

네 살, 한 살의 두 아이가 말간 눈으로 나를 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자전거를 끌고 언덕 위로 올라가야 했다.

다시 거름 더미로 처박히는 한이 있어도 내 자전거가 그대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도록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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