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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May 08. 2023

03. 다른 삶으로의 방향 전환

개인회생이라는 굴레 아래서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운 좋게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다른 지역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집에 대한 애착은 많이 사라진 터였다.

하지만 집에서 40분 거리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던 때와, 4시간 거리에서 하는 대학 생활은 너무나 달랐다.



서울 하늘 아래 서 있는 나는 넓디넓은 바다에 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잔뜩 위축되었다.

서울 아이들의 세련됨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신입생 OT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지내다가 입학식에 맞춰 상경한 나는 이미 무리 지어 친해진 친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낙동강 근처에 살았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종교 역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에서 낯선 이방인인 데다 자존심까지 센 내가 의지하기 쉽지 않았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이미 서울에서 대학 생활 중인 언니와 함께 자취할 거라 기대하며 캠퍼스의 낭만과 자취생활의 자유로움을 꿈꿨다.

그러나 내 짐은 또다시 학교 기숙사에 풀게 되었다.



IMF라는 시대적 불행이 우리 집을 강타했고,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부모님께서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셔서 나는 그 사실을 옥탑방, 반지하 방을 거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한 번씩 고향 집에 갔다가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눈물 바람이었다.

엄마, 아빠에게 씩씩하게 손 흔들어주고 나면 버스가 정류장을 빠져나가 코너를 돌았다.

조금씩 익숙했던 산천이 뒤로 멀어지기 시작하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는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 시간씩 서럽게 울었다.

울고 나면 지쳐서 잠이 들었다.

휴게소에 잠시 정차하면 기계적으로 화장실을 다녀오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서울을 느끼며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살아내야 해’라고 다짐이라도 하듯 어깨가 뻣뻣해지고,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란 나는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대구에만 가도 답답한 공기와 공기 중에 섞인 야릇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오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서울의 거대하고 탁한 공기와 낯설고 막막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눈물은 이미 닦아냈지만 의지할 곳 없는 시간과 공간을 살아내야 하는 나는 두려운 맘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눈물과 함께 떠나던 고향과 친정, 이제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떠나야 했다.

10년도 넘게 떠나고 도착하기를 반복했기에 더는 울지 않는다.

제법 서울이라는 곳에 익숙해졌고, 그곳에서의 나 역시 더이상 이방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억대의 빚과 상처 가득한 맘을 안고 상경하고 있는 나는 처음처럼 막막하고 두려워졌다.

말간 얼굴을 한 채 카시트에 앉은 두 아이를 보았다.

아이들을 위해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에 뜨거운 덩어리가 단전에서부터 울컥울컥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맘 놓고 울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내가 낳은 새끼 오리들의 눈이 너무 말갛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빚을 정리하고 갚아야 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어떻게든 정리하는 거였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정리하는 일은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는 일에 비하면.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삶에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내가 삶이라는 무대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것 같았던 그 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다.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낙관에 의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방향 전환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목표지점도 내딛어야 하는 방향도 모르기에 희망도 낙관도 품을 수 없다.

다만 또다시 급커브나 낭떠러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빚을 갚기 위해서 남편의 꾸준한 월급은 필수였다.

출근한 남편을 대신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돌이 갓 지난 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또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교대역 계단과 법무사 사무실의 높은 건물을 마주했다.

거기가 급커브가 아니기를, 낭떠러지가 아니기를 빌었다.



‘개인회생’이라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걸 받겠다고 높은 건물과 세련된 차림의 직장인들 사이에 후줄근한 모습의 내가 서있었다.

올려다본 건물은 크기와 높이만으로도 나를 압도했다.

받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그 제도의 혜택을 받아보겠다며 용기 있는 척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개인회생 전문 법무사 사무실에 들른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 사실을 숨기려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단단한 척 연기했다.

이미 간절함과 처량함의 기운이 어쩔수 없이 비집고 나왔겠지만.



필요한 절차와 서류들을 안내받는 동안 아이들은 준비해 간 간식을 먹으며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려 주었다.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으며, 마치 이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 서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울컥하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또다시 치밀어 올랐다.

이깟 일로 울컥할 것 없다며 눌러 삼켰다.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법무사의 말이 몇 번이나 떠올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무조건 통과해서 이자만이라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개인회생’이란 이런 것이다.

총채무액이 무담보채무의 경우에는 10억 원, 담보부채무의 경우에는 15억 원 이하인 개인채무자로서 장래 계속적으로 또는 반복하여 수입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3년간(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611조 제5항 단서의 경우 5년) 일정한 금액을 변제하면 나머지 채무의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절차입니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민원센터)      








꼼꼼하게 서류를 준비해 갖다바친 결과, 감사하게도 '개인회생' 제도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 5년간 변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당시 급여에서 4인 가족 최저 생계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전액 갚아야 했다.



그 해의 4인 가족 최저 생계비는 약 160만 원 정도였다.

예를들어 한달 급여가 350만원이라면, 최저 생계비인 160만원을 제한 190만원을 매달 변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정해진 변제금액을 5년간 꾸준히 갚아야 한다.



매달 갚는 돈을 단 한 번이라도 연체하면 모든 게 무산된다.

5년간 갚아야 할 돈을 계산해 보니 거의 1억 가까이 되는 돈이었고, 결과적으로 우린 이자를 제외한 원금을  99% 가까이 갚는 것이었다.



남편이 만든 빚은 1 금융권, 2 금융권, 카드론, 캐피털, 사채까지 골고루 다양한 기관을 출처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가 상당했는데, 그 이자만 정리가 되어도 그게 어디냐며 안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하고 5년간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전세로 살다가는 평생 내 집 마련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절반 이상 은행의 힘을 빌려 집을 샀었다.

하지만 개인회생을 하면서 주택담보대출까지 갚을 수는 없었다.



도로 집을 팔았다.

집을 판 돈 중 일부는 악성 채무(사채) 중 일부를 갚는 데 사용했다.

그러고 나니 전세로도 가기 힘들어졌다.

월세 집을 구해야 했다.


    

최저 생계비는 말 그대로 최저 생계비여서 그 돈만 가지고 4인 가족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월세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동안 두 아이를 맡길 요량으로 시댁 근처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일을 하면 당연히 아이들을 봐줄 것이고, 월세도 주겠다 약속하셨다. (미리 밝혀두자면 월세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고, 아이들도 두어 달쯤 봐주신 게 다였다.)          



그 많은 결정은 순전히 내 생각이고 의지였다.

남편은 내게 강요도 선택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오히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자존심보다 '가족의 살아남기'가 먼저였으니까.



거대하고 막막했던 서울살이에 겨우 적응했는데, 다시 제로로 돌아가 버렸다.

개인회생이라는 제도 아래 매달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내는 데 적응해야 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불어온 허리케인에 휩쓸려 알지도 못하는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

낯선 곳,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마법사의 유리구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도로시에게는 행운처럼 나타난 허수아비와 양철나무꾼과 겁쟁이 사자가 있었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내 앞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도로시에게 강아지 토토가 함께했다면 내게는 두 아이가 있었다.

나만 바라보고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두 아이는 낯선 도시에서 친구였고, 희망이었고, 삶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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