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욕심과 아주 약간 좋은 머리 덕분에 공부도 곧잘 했고, 글짓기, 웅변, 서예 등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조금 더 재수 없어져 볼까?
국민학교 시절엔 2교시 끝나고 하는 중간놀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에어로빅이나 간단한 체조를 했었는데, 단상 위에서 에어로빅 시범을 보이던 아이도 국민학교 4학년의 나였다.
3개의 국민학교 출신 아이들이 모여 한 학년에 2개의 학급이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나는 소위 잘 나가는 아이였다.
전교 1등 자리는 거의 놓치지 않았고, 서예 대회 웅변대회에서도 끊임없이 상을 받아오는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공부를 못하거나, 대회에서 상을 못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수업을 빠지고 연습에 매진하기도 했다.
부족한 공부는 초저녁 잠이 많았던 탓에 일찍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보충했다.
한번 높아진 기대감은 좀처럼 내려오질 못했고, 그런 기대감에 충족하기 위한 나의 노력 역시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런 과정 중에도 내게 칭찬이나 보상은 없었다.
‘당연하지, 그 정도는 해야지’라는 듯한 반응 또한 나는 당연한 줄 알았다.
딱히 서운한 마음도 없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고입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했던 그때.
비평준화 지역에 살고 있던 나의 목표는 너무나 명확하게 명문고 진학이었다.
누구도 나의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고, 나 역시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언니가 이미 그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기숙사에서 자보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필 중요한 시험 전날에.
내가 잠자리를 가린다는걸 그날 처음 알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자는 것이 익숙치 않은 데다 기숙사는 너무나 낯설고 춥고 불편했다.
밤새 뒤척이다 멍한 상태로 시험지를 받게 되었다.
3교시까지는 어찌어찌 버텼는데, 마지막 영어 시험 시간에 졸고 말았다.
심지어 내가 조는지조차 몰랐다.
듣기 평가가 끝난 후 내가 졸았다는 걸 알았고, 지문을 듣지 못하고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었다.
시험을 망쳤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엄마와 언니가 결과를 보러 간 사이 화장실로 숨었다.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내가 떨어졌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합격 커트라인이 200점 만점에 193점이었다고 한다.
내 점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88점 정도였던 것 같다. (세상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공부로 안될 것 같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나가지도 못하고 울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
“뭘 잘했다고 우노? 빨리 안 나오나.”
창피함과 원망이 뒤섞인 목소리.
친구들에게 동생이 시험을 본다고 알렸던 언니 역시, 동생이 불합격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기 창피했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지도 못했다.
이틀을 속상한 마음을 안고 끙끙 앓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괜찮아.”라는 위로의 말을 듣지 못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뭘 잘했다고...”라는 말만 맴돌았고, “잘난 척하더니..”라는 듯한 시선만 느껴졌다.
전우영 사회심리학자는 <당신의 마음에 영화를 처방해 드립니다>에서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아주 강렬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접근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쉽게 꺼낼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 만약, 그 강렬한 사건에 독약이 들어 있으면 그 기억은 트라우마가 된다.”라고 말했다.
그때의 기억은 내게 강력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차선으로 선택해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적응하지 못했고, 2년을 꼬박 아팠다.
원인은 없었다. 그냥 아팠다.
몸이 붓고, 아프고,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고 했고, 자주 다녔던 약국에서는 피가 몸에 잘 돌지 않아서 그렇다며 조혈제를 먹으라고 했다.
2년을 조혈제를 먹고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그래도 낫지 않는 환자를 보고 의사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대학 가면 나을거에요."
고등학생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 이후 내게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도전’이라는 행위가 불가능해졌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졌다.
공부도 내겐 하나의 도전이 되어버려서 그 시간을 감당하기 싫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문제아가 되어버렸다.
무언가에 ‘실패’한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실패’하면 안 된다고.
내 무의식은 끊임없이 내게 속삭였다.
그 이후의 내 모든 삶과 선택은 ‘실패하지 않기 위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적당히 안전한 선택을 했고, 실패할 것 같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몹시도 웅크린 상태로 살았지만 겉으론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았다.
남편의 거대한 빚이 밝혀졌을 때,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갔을 때,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단 단어는 ‘실패’였다.
내 결혼 생활이 ‘실패’ 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졸았던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가만히 있다가 ‘실패’의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괜찮다. 살면서 누구나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래도 다 살아갈 방법이 생긴다.” 정도의 위로.
그거면 충분했을지도 모르는데,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조차도 부끄러웠다.
내 실패한 결혼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던 것 같다.
현실은 그렇다 해도 나조차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려 했다.
아파하지도 불행해하지도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특히 아이들 앞에서는 더 환하게 웃었고, 더 쾌활하게 행동했다.
그 일을 곱씹지 않으려고 더 많이 움직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가고 놀이동산에 갔다.
아무 문제없는 화목한 가족인척 행동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우울한 모습,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아, 다 들통나고 말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그 후 종종 보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껏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아이들이 웃게 해주고 싶었다.
더이상은 내 인생을 ‘실패’라는 트라우마에 가둬두고싶지 않았다.
누구도 해주지 않는 그 말을 나 스스로에게 해주기로 했다.
“괜찮아. 이깟 일로 인생 끝나지 않아. 해결하면 돼.”
별거 아니라고, 인생에 특별한 순간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이 일을 견뎌내고 나면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다짐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끝없이 되뇌었다.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신기해하는 두 아이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냥 다 지나가는 순간 같았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삶에서 그냥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차츰 하나씩 깨달아갔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뛰는 그 순간에 집중하는 일이 당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