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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May 12. 2023

05. 산이 허락한 양면의 시간

동전도 아니면서 양면을 가지고 있다니

내가 일곱 살 즈음부터 살았던 친정집은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뒤로는 낮은 산과 집 앞으로는 도랑이 흘렀다.

도랑은 시멘트로 덮고 길로 만들어버려서 이제는 배산만 갖춘 땅이 되었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 집이 시골 초가집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던 마당 넓은 양옥집이었다.)



어릴 땐 그 산이 나의 놀이터였다.

아이의 다리로도 걸어 오를 수 있을 만큼 높지 않았고,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산속 동굴도 만날 수 있었다.         

동굴에 들어가면 비를 피할 수도 있고, 그곳이 마치 집인 양 엄마 아빠 놀이도 할 수 있었다.

동굴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냇가 옆 둑으로 연결된 곳에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우뚝 설 수 있었다.   


       

산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놀이터였다.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만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가을에는 낙엽더미를 이불처럼 깔고 누울 수도 있었다. 산딸기와 뱀딸기, 알 수 없는 꽃들과 다양한 풍경도 마주했다.

재미있는 동굴과, 걸음이 빨라지고 수월해지는 내리막을 만난다는 설렘까지 더해져 그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가을엔 엄마와 함께 도토리를 줍기도 하고, 우리 집 강아지가 죽으면 그 산에 묻어주기도 했다.


         

밤에는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캄캄해서 쳐다도 보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침만 되면 온갖 새소리를 선물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사락사락 소리가 정겨운 곳이었다.

산은 오르기 힘든 무엇이기보다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키가 자라면서 그 산은 그저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는 곳이 되었다.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았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놀이는 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친정집 뒷산은 그때 모습 그대로다.

키도 덩치도 자라지 않았다.

여전히 밤이 되면 귀신이 나올 것처럼 캄캄하고, 아침이 되면 요란스러운 새소리를 선물해 준다.



내 키가 자라면 산이 조금 낮아 보이고 작아 보일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오르고 또 넘어갔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그땐 놀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오른다 생각하지 않고 논다고 생각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오르내렸겠지.

거기에 보물이 있고, 우리의 아지트가 있고, 즐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겁도 없이 산을 타고 놀았을 것이다.          








내 인생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을 만났을 때, 놀이처럼 즐기려고 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산을 오를 때처럼 거기 마법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겼다면 말이다.  


        

어릴 때 자주 올랐던 그 산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판판해진 길이 있었다.

사람들이 밝고 또 밟아 걷기 쉬워진 길이었다.

무작정 타고 넘었던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그 길을 따라가야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다칠 일이 없었다.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다치지 않고 꿈같은 그 시간과 공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만난 보이지 않는 산, 그 안에서 처음 걸어보는 길에는 밟기 쉬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밟아야 안전한지, 미끄러지거나 굴러 떨어지지 않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님, 왜죠?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해요?”     


귀신 나올 것 같은 캄캄한 산은 쳐다도 보지 않던 시간을 뒤로하고, 캄캄한 산길 같은 시간을 걸어야 했던 나는 해가 뜨기 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시간부터 일어나 기도했다.  


        

매달 200만 원도 안 되는 돈에서 월세와 각종 공과금과 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수중에는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이 남았다.

그 돈으로 출근해야 하는 남편 용돈을 주고, 식비와 생활비, 각종 경조사비까지 해결해야 했다.          



시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 보험료를 내고 있냐.”고 했다.(그런 상황이라 보험이 더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아무 데도 보내지 못하는 내 형편을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 태권도라도 보내라”며 채근하셨다.



자주 쇼핑한 옷을 자랑하거나, 홈쇼핑에서 네, 다섯 벌을 세트로 파는 옷을 사서는, 그중에 안 입는 색깔은 “이거 너무 예쁘지? 너 입어라.”라며 생색내는 것처럼 주고 가시기도 했다.

“이거 십만 원밖에 안 하니까 너도 하나 사라 얘.”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시누이는 스트레스받아서 쇼핑 좀 했다며, 만날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로 바꾼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푼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내게 날아와 차곡차곡 쌓였다.   


       






만 원짜리 티셔츠 두 장으로 여러 계절을 나야 했던 나는 무언가 찾아야 했다.

그 옛날 코를 찌르는 거름 냄새에도 ‘봄이구나’했던 것처럼, 시궁창 같은 삶에서도 살아내기 위해 맑은 향기 같은 깨달음을 찾아 코를 킁킁댈 수밖에 없었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저 불빛들을 기억해>에는 말벌에 관한 일화가 하나 나온다. 집 처마에 집을 지은 말벌에 어깨를 쏘이고 난 시인은 또다시 집을 짓는 말벌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정작 나를 괴롭힌 것은 말벌들이 아니라 언제 다시 말벌에 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어릴 적 놀이처럼 올랐던 산에서 나는 제대로 넘어지거나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산을 오르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거대한 빚이라는 산에 제대로 부딪친 나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만큼이나, 혹시 다 못 갚고 이자까지 얹은 빚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또 다른 빚이라는 커다란 산이 내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두려움은 떠나지도 않고 내 친구가 되려고 했다.

“너와 평생 함께 갈 거야.”라며 슬며시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두려움이 나를 압도하면 나는 “도대체 왜 그랬냐”며 남편을 향해 울분을 터뜨렸고, 그 울분이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메아리처럼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 때마다 절망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세 가지 변신을 이야기했다.

낙타와 사자의 단계도 훌륭하지만, 마침내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라는 이상향보다 당장 내게 지워진 짐의 무게부터 견뎌내는 낙타부터 되어야 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일을 ‘인정’부터 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 운명 같은 시간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가끔 산속에 숨겨놓은 동굴처럼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다.

그러나 인생은 동화가 아닌, 참으로 정직하고 씁쓸한 다큐멘터리였다.

일단 두려움과는 동거를 계속해나가야 했다.

낙타처럼 무거운 그 짐을 조금씩 견뎌나가는 일 자체가 무릎이 꺾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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