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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May 15. 2023

06. 재미로 하나?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걱정은 걱정하는 시간만 늘릴 뿐

“언니야, 재밌나?”

“재미로 하나?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유치원생이었던 나(경상도 여자)는 동네 언니가 도랑 빨래터에 앉아 빨래하는 모습을 그 옆에 앉아서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젖은 빨래에 비누칠을 해서 박박 문지르고, 빨래 방망이로 탕탕 두드리는 모습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그렇게 여러 번 문지르고 탕탕 두드린 빨래를 흐르는 도랑물에 씻어내면 거품과 함께 더러움이 씻겨 나가고 깨끗해진 빨래가 물밖으로 짠 하고 나오는 것이다.

그 과정이 마치 마법 같았다.          



엄마는 늘 욕실에서 빨래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리곤 했는데, 나는 그렇게 손빨래하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 빨래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나는 그날 입었던 옷을 죄다 벗어서 세숫대야에 담았다. 그리고 빨래 비누와 방망이를 챙겨 들고 집 앞 도랑으로 갔다.



빨래터에 쪼그리고 앉아 동네 언니가 한 것처럼 빨래를 도랑물에 담갔다 꺼냈다.

젖은 빨래가 제법 무거웠지만 낑낑대며 건져 올렸다.

젖은 옷에 비누칠을 하고 작은 손으로 조물조물 문질렀다.

그리고 방망이를 꺼내 들고 탕탕 두들겼다.

까맣던 양말 얼룩 방망이에 맞고 나면 깜짝 놀라 도망치듯 사라졌다.

제법 깨끗해진 빨래를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도랑물에 헹궈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뭐 얼마나 깨끗하게 빨았겠나.

물기를 깨끗하게 짜지도 못해서 엄마가 다시 짜주었으리라.

빨래를 아예 다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나의 외할머니는 나중에 내가 결혼한 이후에도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그 쪼끄만기 유치원만 댕기오믄 지 옷을 홀랑홀랑 벗어가 다라이에 담아갖고, 도랑에 앉아서 톡톡 뚜들기가매 을매나 야무지게 빨아쌌다 아이가.”     


외할머니는 7살짜리 아이가 했던 행동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할 때마다 흐뭇하게 웃는 얼굴이 되시곤 하셨다.

제법 공부도 잘했던 과거의 손녀를 떠올릴 때보다 더 흐뭇해하셨다.   


       

나는 그렇게 재밌어 보이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죽어도 해야 하는 아이였다.

웬만해선 집을 꺾기 쉽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때 너무 순했던 과거가 크면서 고집 있는 아이로 자라야겠다는 결심을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갓난아기 때 나는 자고 일어나도, 똥오줌을 싸고 그걸 깔고 누워있어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애가 자는 줄 알고 편하게 일하던 엄마는 한번씩 들여다보면 내가 발을 잡고 놀고 있어서 놀라곤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순둥이 딸내미가 까탈에, 황소고집에,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하는 뚝심까지 갖춘 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학교에서 타래과라는 과자 만들기 실습을 했는데, 그게 재밌었던지 집에 와서 밀가루 내놔라, 기름 꺼내 달라, 버너 달라, 설탕 달라 난리를 쳐서는 기어이 집에서 타래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타래과는 직사각형에 가운데만 꽈배기처럼 꼬아 모양을 만든 밀가루를 기름에 튀기고, 설탕시럽을 입힌 과자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과자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것이다.

그걸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했고, 그 수제 과자를 온 가족의 입에 하나씩 넣어주고서야 만족했다.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그 난리가 벌어졌던 것 같다.

그때마다 온 집안을 기름투성이로 만든다고 외할머니는 “빌난 년”이라며 욕을 하면서도 웃으셨다.    


       

엄마는 그 옆에서 밀가루 꺼내주고, 기름에 튀기는 건 당신께서 직접 해주시며 “카지마라~이런 것도 다 공부다.” 라며 외할머니께 도려 역정을 내시며 작은 딸내미를 도와주셨다. 정작 과자는 별로 드시지도 않았지만,

“이래 하면 되는기가?” 라면서 즐거워하셨다.

퇴근해 온 아빠에게 “작은 딸이 만든 과자”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하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잘할 때만 자랑스러워하셨던 건 아닌 것 같다.

이래서 나쁜 기억의 힘이 크다고 한 걸까.

나쁜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에 반해 좋았던 기억은 저 밑에 숨어있다가, 내가 파헤치고 파헤쳐야 겨우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언니와 함께 수박 껍데기로 온 거실을 스케이트장 삼아 타고 다녔던 일처럼 시작은 즐거웠으나 욕먹는 것으로 끝난 일은 파헤치지 않아도 자주 떠오르긴 한다.








어른이 되고 나니 그때처럼 즐겁고 막 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일을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빨래나 요리 같은 일은 더 이상 즐겁지도 신나지도 않는다.

대신 무섭고 지루하고, 걱정스러운 일은 더 많고 더 자주 만난다.

예를 들면 1억이 넘는 빚을 갚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잘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 같은 건 상상하기도 싫기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에 읽은 책 중에서 읽기를 정말 잘했다 생각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이었다. 정확한 문장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배운 방법 중 지금껏 기억하는 건 이런 거였다.          



자,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치자.

이걸 걱정만 하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아니다. 먼저 분석을 해야 한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뭐지?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나처럼 감정적인 사람은 종종 문제 자체에 압도당하면 이성을 잃어버리곤 한다.

그냥 복잡한 감정에 매몰돼서 해결이고 뭐고 우울감과 불행감에 빠져 허우적대기 쉽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이미 삶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 것 마냥 희열에 찼다.  

         

'그렇구나. 걱정은 문제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기면 굳이 하나하나 앉아서 걱정하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구나’ 하는 이 단순한 진리에 나는 얼마나 열광하고 그대로 따라 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1억 빚' 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해결해 보려고 했다.


“자, 문제가 뭐지? 내가 뭐부터 해야 하지?”


힘들고 아프고 원망스러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감정은 감정이고 일단 결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가장 먼저 수입을 늘려야 했다.

매달 꼬박꼬박 돈을 갚고 나면 식비조차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외식은 꿈도 못 꾸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아직 어려 외식하면 오히려 힘들기만 할 거라며 위안 삼았다.

그러나 식재료 사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건 속상한 일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재료로 만든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직장을 오래 다녔던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경력단절 여성에 불과했던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다 '독서 지도사'라는 일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책육아에 열심이었던 내가 하기에 적당한 일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일하는 시간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또 내가 직접 공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면 아이들이 크는 동안 책육아를 좀 더 전문적으로 잘할 수 있겠다는 오만방자한 마음도 들었다.          


걱정에 설탕시럽을 입힌 듯 달콤하고 반짝이는 해결책 같아 보였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될까? 안될까?'를 고민할 틈이 없었다.

하고 싶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던 그때의 나처럼, 하고 싶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그 일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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