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현 Jun 04. 2024

3. 여행자의 지위를 손쉽게 얻는 법


 2주 후에 떠날 여행패키지를 선택한 날.

 가장 먼저 떠오른 사실이 있었으니 우리 집 캐리어가 현재 부상병이라는 사실이었다. 

 바퀴에 부상을 당한 그 녀석은 캐리어 특유의 돌돌거리며 구르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런 캐리어를 끌고 꼬박 12시간이나 걸리는 튀르키예까지 날아가 또다시 여기저기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고행길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현재 검색 몇 번과 터치 몇 번에 해외여행 예약부터 쇼핑까지 다 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필요한 건 뭐? 돈과 시간뿐이다. 

 문제는 늘 그렇듯 그 두 가지는 언제나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 한다는 당위성이 현실보다 우위에 있었기에 고민 없이 검색에 착수할 수 있었다.









 우선 적당한 사이즈를 조사한다. 

 블로그와 쇼핑몰 후기를 둘러보며 4인 가족이 7박 9일의 일정을 소화하기에 적당한 사이즈를 찾아낸다. 

 하나의 캐리어에 네 명의 짐을 때려 넣을 수는 없으니 두 개로 나눈다고 생각하고, 각각의 캐리어에 두 명씩의 짐을 나누어 담는다면 26인치면 적당하지 않을까. 

 수많은 후기를 봤음에도 결국엔 ‘느낌상 그렇다’에 한 표를 던지며 결론을 내렸다.(짐을 쌀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26인치는 턱없이 부족하단걸 매일 매 순간 깨달았지만 이때는 26인치가 굉장히 넉넉한 사이즈라고 착각했다) 



 바퀴가 고장 나 속 썩이는 캐리어 브랜드를 제외하고(나 뒤끝 많은 여자다) 이름 있는 브랜드부터 검색했다. 그다음은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후기가 많은 브랜드, 튼튼해 보이는 디자인까지 고려해 모델을 결정했다. 색상 선택은 아이들에게 맡겼다. 큰 아이는 무난해 보이는 실버를(회색지대를 좋아하는 것 같다) 둘째 아이는 깨끗해 보이는 아이보리를(뒷감당은 자기가 할 게 아니므로) 골랐다. 수십 개의 선택지를 꼼꼼히 살펴보느라 이미 진이 빠져버린 나는 더 이상 선택을 위한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심 쓰듯 아이들이 고른 컬러를 선택하고 주문 버튼을 터치해 버렸다.



 캐리어를 위한 거금을 쓰고 나니 이제 좀 여행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여행사에서 온 예약 확인 문자도 주지 못한 ‘실감‘을 하게 된 건 무언가를 싣고 운반하는 '물건'이 주는 설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항 가는 길을 참 좋아하는데 꼭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그 길을 달릴 때 특유의 설렘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캐리어를 싣고 달릴 때와 텅 빈 짐칸으로 달릴 때의 기분은 천지 차이다. ‘여행 기분 난다!’와 ‘몇 시간 후면 비행기 탄다.’는 하늘과 땅끝만큼의 차이랄까.



 캐리어는 그런 존재다. 

 국내 여행을 갈 때, 명절에 친정집에 갈 때도 끌고 가는 게 캐리어지만, 해외여행 패키지를 끊어놓고 사는 캐리어의 존재감은 완벽하게 다르니까.



 참 빠른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덕택에 캐리어는 이틀이 지나지 않아 우리 집 현관문을 막고 위풍당당하게(박스에 쌓인 채) 서 있었다. 둘째 아이 두 명 정도 충분히 넣고 택배로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나는 박스 두 개를 끙끙대며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드디어 개봉박두. 

 실버와 아이보리 컬러에 가늘게 세로 골지가 들어가 있고 네 귀퉁이에는 충격을 방지하기 위한 덧댐 장식까지. 뭐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다. 요즘 캐리어에는 다 있다는 내장형 TSA 잠금장치와 강도, 온도, 낙하, 바퀴, 핸들, 지퍼 테스트까지 거치고 합격 판정을 받은 캐리어다. 그래서 그런지 바퀴도 부드럽게 잘 돌아가고 인체공학적 디자인으로 만들었다는 손잡이의 그립감도 손에 쫙 붙는 느낌이다. 



 


 남편과 아이들도 이제야 여행이 가까이 다가온 느낌인지 들떠 보인다. 함께 온 항공커버와 네임텍조차 신기해하며 캐리어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열어보고 뜯어보며 음미한다. 그러다 안에 들어있는 품질 보증서를 발견했다. 정품 등록을 해야 AS가 된단다. 

 


  AS? 음... 그런 게 되는구나. 

 응? 그럼 현재 부상병 신세인 그 녀석도 AS가 되는 것이었단 말인가?

이전 02화 2. '좋다'와 '괜찮다'의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