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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Jun 06. 2024

4. 아는 것이 돈이다

  내겐 이상한 병이 하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정리벽이 심하게 도지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건 모조리 긁어모아 싹 갖다 버리곤 한다.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통한다. 모조리 버리고 텅텅 비어있는 공간을 음미하는 행복이란. 이 맛에 정리하는 거다.



 부상병인 그 녀석(바퀴가 고장 난 캐리어)의 AS 방법을 알아보니 보증서 또는 구매영수증을 지참하고 매장에 방문하란다.  그런 게 남아있을 리가 없다.



 구매 내역이 없는 경우에는 보증 적용에 제한이 있다 한다. 홈쇼핑을 통해 구매한 경우에는 홈쇼핑 측에 문의하란다. 사실 난 그 캐리어를 어떤 경로로 샀는지, 즉 구입처가 홈쇼핑이었는지 온라인몰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히 살 때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찾고, 여러 모델을 비교해 보고 선택한 것일 텐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출처조차 불분명한 물건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으니, 바로 여행 정보를 찾는 일이다.

 여행을 결정하고 많은 정보를 동시다발적으로 찾고 있는데, 이럴 때의 나는 대기업 뺨치는 문의발 식 정보확장을 한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다양한 루트로 찾아 모으고,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 역시 다양한 검색어를 입력해 출력 정보를 다양화한다. 이렇게 세밀하게 작업해야 혹여 내가 몰라서 못 챙겨간 그 준비물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여행지가 ‘튀르키예’이기 때문에 ‘튀르키예 여행 준비물’이라고 검색하면 된다. 하지만 지구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여행자들의 생각도 그들이 글을 쓸 때 뽑아내는 키워드도 다양하다. 때문에 단순히 그렇게만 입력하면 결괏값의 빈 구멍이 문어발에 붙은 빨판만큼 많아진다. 그래서 입력한 검색어를 대충 추려보면 이렇다.     



 튀르키예 패키지여행 준비물, 튀르키예 2월 여행 준비물, 튀르키예 4인 가족 여행 준비물, 튀르키예 2월 날씨, 초등학생 둘 포함 해외 가족여행, 해외여행 준비물, 해외 패키지여행 준비물, 튀르키예 USIM, 튀르키예 환전, 기내 준비물, 패키지여행 준비물, 해외여행 4인 가족 데이터 사용량, 해외여행 로밍, 해외 가족여행 포켓와이파이, 유심 핫스팟 노트북, 튀르키예 여행 트레블월렛, 유로환율, 달러환율, 튀르키예 환전 수수료 등등등...     




 네이버와 유튜브 브이로그를 통해 해외에서 한 달 살기라도 할 것처럼 정보를 모으고 또 모았다.

 나는 굉장히 즉흥적인 극 P성향이다. 그렇지만 해외여행은 자칫 잘못하면 국제 미아가 되거나 말이 안 통해 불편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나는 분명히 패키지여행을 갈 계획이고 가이드가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언제 어디서나 펼쳐지는 상황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모자란 J성향을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앞의 검색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단어를 입력한 덕분에, 어떤 정보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입수한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수없이 많은 정보를 모았더니 준비물 리스트도 셀 수없이 길어졌다.

 이전에도 여행 갈 때 이렇게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었던가. 그동안 나는 여행 한 번 다니지 않고 살았던가.

 필요한 물건들이 너무너무 정말 어이가 없을 만큼 많아졌다. 준비물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가슴이 점점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내 사랑 쿠팡과 다이소에서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하나씩 따로 놓고 볼 때 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한데 뭉치니 어마어마한 힘, 아니 어마어마한 가격을 뽐냈다.

 몇 번을 망설였다. 과연 이 물건이 진짜 필요한 것인가. 예를 들면 발해먹, 전기쿠커, 가습 마스크 같은 것들.



 사실 여행 준비물을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세상에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었다.

 


예를들어  비행기를 장시간 타거나 버스를 오랫동안 타고 이동하는 경우 다리가 붓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은데 발해먹에 올리고 있으면 붓기도 완화되고 편하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의 경우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나와 우리 가족은 이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럴 때 호텔방에서 컵라면과 햇반이라도 먹으려면 전기쿠커가 상당히 유용하다고 했다. 호텔에 전기주전자가 있어도 쓰자니 찝찝하다는 후기글도 많았다.



 나는 맹세코 호텔 전기주전자가 찝찝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사용자가 남긴 후기에 하나하나 설득당하고 있었다.



 건조한 비행기 안에서 가습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숨쉬기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는 것(워낙 전염병에 대해 예민한 시대라)도 마찬가지.



 어쩌면 나처럼 둔한 사람은 준비물이 많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예민한데 그 예민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러저러한 후기와 추천 준비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물건들의 쓰임새가 정말 유용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나만 몰랐던 그 물건을 이미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난 뒤 친절하게 후기까지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그 옛날 ‘맙소사’라며 이마를 치던 한 아역 배우의 표정이 진심으로 떠오르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철두철미함에 감탄했다. 동시에 후발주자이긴 하나 나도 그들의 철저한 준비성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이것도 4개, 저것도 4개, 2개가 세트인 물건은 2개씩 전투적으로 담아댔다. 그리고 결제창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알면 다~~~ 돈이다’

 알면 알수록 없던 필요가 생긴다. 존재의 유무조차 몰랐던 물건의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 급기야 그 물건이 없으면 큰일날 것 같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어느 철학자는 다행히 쿠팡과 다이소의 시대에 살지 않으셨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돈이다. 빈틈없는 여행을 준비하려고 노력 중인데, 이상하게 뭔가 줄줄 세는 기분이다.



 이 여행 괜찮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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