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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Jun 11. 2024

5. 출발 전의 트러블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다.

 눈이 가볍게 떠진다.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한 시간은 5시 30분.

 한 시간 30분 전이다. 모닝루틴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

 일어나서 물 한잔을 마시고, 커피 한 잔과 독서, 이어서 필사를 한다. 순서대로 착착 진행하고 나면 하루가 상쾌하게 시작되는 기분이다.



 모닝루틴은 내가 하루를 잘 살아가기 위한 준비운동과 마찬가지다. 준비운동으로 잠들었던 뇌근육을 깨워줘야 하루 동안 말랑말랑한 상태로 주어진 임무를 착착 수행한다.

 문제는 여행 중이거나 바쁜 일정이 있는 날 루틴을 못 지키면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음의 불편함보다는 잠을 줄이는 쪽을 택하는 편이다. 대신 낮 시간에 병든 닭처럼 졸아댄다. 유명한 명언처럼 습관이 나를 만드는 게 맞는 건지 그저 루틴 중독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을 깨우고 터키 여행책을 30분간 본 후 본격 여행 준비에 돌입한다.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선크림만 바르고 눈썹의 부족한 부분만 대충 메운다. 변신까지는 필요 없는 메이크업이라 빠르게 끝내고 곤히 자는 아이들을 깨운다. 내 몸뚱이 하나라도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아이들을 챙기기 편해진다. 사고가 나서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일 때도 부모가 먼저 쓴 다음 아이에게 씌워주라고 하지 않는가. 일단 내가 숨을 쉴 수 있어야 아이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다. 모든 준비는 내가 먼저, 맛있는 것도 내 입에 먼저 넣고 본다.(기미 상궁 역할도 겸할 겸)




 평소와는 다르게 여행을 가기 위한 기상이라 누구도 칭얼대지 않고 즉각 일어난다.

 먼저 싸 놓은 준비물에 세면도구까지 꼼꼼하게 챙겨 넣는다. 바리바리 싼 짐들이 삐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밀어 넣고 지퍼를 잠근다.

 5시 40분 출발. 예정 시간보다 10분이 늦었다.








 지퍼백에 담아 온 사과를 먹으며 공항 가는 길.

 bts의 '윙스'와 볼 빨간 사춘기의 '여행'을 들으며 분위기를 띄운다. 남자 셋 여자 하나인 우중충한 가족이라 내가 나서서 유난을 떨지 않으면 곧 각자만의 명상 시간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공항에 도착하자 발레 주차해 주시는 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단 시작은 순조롭다.

그러나 여행사 카운터를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국제선을 타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는데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니 새삼 그 규모가 놀라웠다. 12번 게이트에서 내려 차를 맡기고 여행사 카운터가 있는 1번 게이트까지 걸어갔다. 따뜻한 실내 온도와 무거운 캐리어덕에 체온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묵직해져 올 즈음 여행사 카운터에 도착해 안내문에 사인을 했다. 여행 일정표를 담은 지퍼백과 기내용 실내화를 수령했다.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을 부치기 위해 아시아나 카운터로 갔다. 마치 길고 커다란 뱀이 네 번쯤 몸을 꼬아 똬리를 튼 것 같은 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리면 어쩌나 싶어 꽁무니에 서서 한숨을 쉬었으나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모두가 순조로운 여행을 바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대동단결한 것 같았다.



 

 딱 한 명 대동단결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둘째 아이였다.

 수하물을 부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였다. 둘째 아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이는 기나긴 줄이 끊어진 지점을 찾아 재빠르게 줄에서 빠져나갔다. 잠시 다시 돌아온 아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다리가 아프다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던 아이가 아직 짐을 부치기 전에 다시 한번 가까이 왔다.


 "엄마, 배가 또 아파."

 "또? 왜 그러지?"


 사과를 괜히 먹였나? 별일 아니겠지? 걱정되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했다.

 짐을 부치고 환전을 하러 가는 길. 아이는 또 한 번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는 아이 얼굴이 조금 노래졌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약국 위치를 확인해 두었다.




 아이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동안에도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착착해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이 여행을 가고야 말겠다는 결의 같은 거랄까? 그런데 환전을 하고 나서 돌아본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큰일이다. '이러다 못 가는 거 아냐?'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행히 약국의 위치는 미리 파악해 두었다. 잰걸음으로 약국엑 가서 아이의 증상을 얘기했다. 설사를 진정시키는 약을 사서 먹인 후 들끓는 장이 진정되도록 잠시 앉아서 기다렸다. 아직 키가 작아 약이 장까지 가는 시간이 짧았던 걸까? 생각보다 빠르게 아이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함께 굳어가던 나머지 가족들의 표정도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


 아이의 한 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짐을 도로 찾지 않아도 된다.

 환전한 돈을 재환전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아이가 웃는다.



 

 이 얼마나 감사한 순간인지.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감사가 흘러넘치고 기쁨과 설렘은 최고조였다.



 

 그러나 오래 누릴 여유가 없다. 보딩 시간이 임박했다. 서둘러야 했다. 각자 여권과 보딩패스를 들고 출국 심사대 앞에 섰다. 여권의 비어있는 장에 출국 도장이 찍혔다. 드디어 여행자의 신분을 얻었다. 우리 가족은 두꺼운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가벼운 표정으로 출국장에 들어섰다. 여행 목적의 절반은 이미 이 순간에 이루어진거나 다름없었다.




 7번 게이트로 가는 동안 반짝이고 번쩍이고 향기로운 것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눈길 줄 잠깐의 여유조차 없을만큼 보딩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기어이 작고 소중한 카드를(사실 그것과 연결된 통장을) 긁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7번 게이트 앞에 앉아 한숨 돌리자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들. 남편이 던킨도넛에서 커피와 주스, 미니 도넛을 사 와서 간단히 먹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여행 출발을 알리고, 혈색이 돌아온 둘째와 씩씩한 첫째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볍다 못해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탑승구를 지났다.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았다. 짐을 머리 위 짐칸에 올리고 드디어 가뿐해진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아이의 장이 계속 문제를 일으켜 이 순간을 경험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던 마음이 완벽하게 씻겨 나갔다. 그 장의 소유자 역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었으며 이제 떠오를 순간의 복합적인 감정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있다.

여행하는 동안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순간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집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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