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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드림의 피해자

by 미누리

기어코 사달이 났다. 마히양가나 사업 소식이 공중파 뉴스에 방영됐다. 나는 1초가량 짧게 스쳐 갔을 뿐인데, 책임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이름 있는 분이라 그런지 파급력이 무시무시했다. 지인들이 텔레비전과 페이스북에서 나를 봤다며 연락해 왔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이주민들에게까지 소식이 퍼졌는지,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연락해 도움을 청하며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조카에게 한국어 좀 가르쳐줘.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거든.」


「그 스님이랑 아는 사이야? 우리 동네에도 도움 필요한 사람이 많아. 스님 연락처 좀 줄래?」


「왜 말도 없이 갔어? 알았으면 너한테 우리 가족 선물이라도 보냈을 텐데.」


「한국에 들어올 때 스리랑카 음식 좀 챙겨줄 수 있어?」


스리랑카에 간다고 소문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누군가는 나를 통해 체면을 세우려고 했고, 누군가는 나를 배달부로 이용하려고 했다. 물론, 내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건 꽤 서운한 일이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잘 지낼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부탁부터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부탁을 다 들어줄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고 아량이 넓지도 않다. 그런데 거절하면 실망한 티를 팍팍 내니 더 섭섭했다.


스리랑카에 돌아와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다. 그 만남을 일일이 글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관계에서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털어놓기에 바빴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반복되는 하소연에 그만 지쳐버렸다. 스리랑카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만나는 이마다 당연하다는 듯 도움을 청해오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따뜻한 말을 건넬 만큼 여유로운 처지는 아니다. 스리랑카에서도 한국에서도 스리랑카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지갑을 열곤 했는데 그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슬슬 부담되기 시작했다. 물론 감내하겠노라 마음먹고 돌아온 거였지만, 막상 이곳에서 수입 없이 지출만 이어지자 불안이 몰려왔다. 더 이상은 사람들을 감싸안을 여유도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부담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서 시작됐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가장 일하러 가고 싶어 하는 나라는 단연코 한국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토록 한국에 열광하지는 않았는데, 한류의 영향이 커진 데다 국가부도 이후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진 현실이 맞물리며 많은 이들이 '코리안드림'을 꿈꾸게 되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나의 후광도 커져만 갔다. 한국이 잘 나간다고 해서 나까지 잘 나가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부자인 줄 안다. 코리안드림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에서 온 나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한국을 포함한 해외 유튜버들이 스리랑카 현지인들에게 거액을 선뜻 안겨주고 가거나, 집에 놀러 가 고가의 가전제품을 선물해 주고 가는 콘텐츠가 유행처럼 번져버리면서 나를 향한 기대의 기준도 바뀌어버렸다. 얼마 전에는 한 친구가 갑자기 나를 데리고 쇼핑몰에 가더니, 선물을 사달라고 은근히 눈치를 준 적이 있었다. 보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간 친구가 나를 지갑으로 보는 건 마음 시리도록 쓸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가진 것이 더 많기에 할 수 있는 재수 없는 푸념인 것이다. 아주 배부른 고민.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어도 나를 좋아했을까?'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의심했다. 나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스리랑카 사람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닌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국인이 아니어도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이 섬 어딘가에 나의 알맹이를 봐줄 사람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십 대 초반이던 시절, 콜롬보(Colombo) 구석의 한 마을에서 1년 동안 봉사한 적이 있다. 새파랗게 젊었던 나는 겁도 없이 동네 중년의 여성들을 모두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중에서도 유독 믿고 기댔던 엄마가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 엄마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편지를 쓰고, 선물을 보내고, 경조사를 챙겼다. 빈손으로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국에서 챙겨온 작은 선물과 밤새 정성 들여 쓴 손 편지를 가방 안에 넣어갔다.


6년 만에 방문한 마을에는 물리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아파트 몇 채는 거뜬하게 지었을 시간이다. 바뀐 게 있다면 출근길에 손을 흔들어주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매일 점심을 사 먹었던 단골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마을에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이 들어왔지만, 내가 이곳에서 느끼는 상실을 채워줄 순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다정한 것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마음 한쪽이 접힌 것처럼 공허하면서 답답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얼른 엄마를 만나 접힌 부분을 곱게 펴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엄마는 변함없이 아름다웠지만, 예전과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는 내가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 그리움이 스리랑카에 돌아오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되었는지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쓸데없이 촉이 좋은 나는 엄마가 기다렸던 것은 내가 아닌 선물이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다.


그녀도 뉴스에서 나를 봤다고 했다. 마히양가나 이야기를 꺼내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 돈을 우리 가족에게 줄 순 없냐고. 왜 우리는 도와주지 않느냐고. 그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농담이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물질적 지원을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말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녀는 내 경제력을 궁금해했다. 한국에서 많은 돈을 벌고 금의환향한 한국인 친구를 기대했겠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낙오자였다.


사람이 보고 싶었던 사람과 선물이 받고 싶었던 사람. 서로의 기대가 다르니 분위기는 어색하고 시선은 빗나가고 대화는 겉돌았다. 내가 조금 더 휘황찬란한 선물을 꺼냈다면 분위기가 풀렸을까. 지니의 램프에 소원을 빌어 더 크고 반짝이는 선물을 내어놓고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그녀가 바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가 불편해 줄곧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창밖은 비를 흩뿌릴 것처럼 회색으로 덮여 있었다. 한때 엄마였던 여자가 내게 말했다.


"한국에 가면 화장품 좀 택배로 보내줘."


그녀는 기대했던 비싼 화장품을 받지 못해 억울했고, 나는 그녀를 그리워했던 마음이 허망해서 억울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지만,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게 오해였을 수도 있다. 충분히 풀 수 있는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지금 오해를 풀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가 소원해지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서 작은 인연 하나에도 연연하던 나는, 이번엔 조금 낯선 선택을 했다. 진실이 어떻든 감정을 꺼내 보일 여유도 관계를 붙잡을 기운도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돌아서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조만간 또 놀러 오라고 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대답이었다. 다시는 이곳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회색 하늘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당장 캔디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탄 버스는 떠났고, 나는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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