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보에 살았을 때, 주말마다 집 주변의 농학교(Deaf School)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때 알게 된 날리니 선생님이 퇴직 후, 고향인 칼루타라(Kalutara)에 어린이집을 개원했다고 해서 이틀간 그곳에서 신세를 지면서 보육 업무를 도와드리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아침 7시부터 어린이집에 출근해 아이들을 돌봤다.
어린이집에는 1세부터 5세의 영유아가 15명 정도 있었고, 교사는 4명이 있었다. 날리니 선생님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원생과 학부모 모두 그녀를 신뢰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들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고, 어린이집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은 다 같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아이 돌보미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어 육아는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스리랑카 아이들을 돌보는 건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여기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나라다. 어린아이들은 손 사용이 익숙하지 않으니 어른들이 밥을 먹여줘야 하는데, 아이들 입에 비해 선생님 손이 부족했다. 화장실에서는 휴지 없이 왼손을 사용하다 보니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이곳의 생활 방식에 나 하나를 끼워서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그 방식대로 누군가를 보살피는 건 달랐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스럽지만, 내가 예전만큼 아이들과 놀아줄 체력이 안 된다는 것도 실감했다. 스리랑카에 오고 매일 여기저기 초대받아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숨 가삐 움직였다. 연속된 외출로 기력 소모가 컸나 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 밑이 퀭해졌고, 손톱 주변 살갗이 벗겨졌다. 얼른 선생님 집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점심 먹고 이제 한숨 돌리나 했더니 날리니 선생님의 큰딸 사마디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친한 언니가 무용 학원을 하는데,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마을에 있는 무용 학원에 가면 스리랑카 전통 무용인 캔디안 댄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나는 학원에서 가만히 앉아 손뼉만 치고 올 생각으로 사마디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가깝다고 했던 학원은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했고, 가는 데만 1시간 30분이 걸렸다. 알고 보니 학원 대표 산지와니 씨는 사마디의 남자친구의 누나였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곧 시누이가 될 관계였다.
그들은 학원 홍보 영상이 필요하다며 캔디안 댄스 동작 몇 개만 연습하고 촬영하자고 졸랐다. 나는 춤을 출 생각도, 영상을 찍을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마디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냐며 제발 한 번만 찍자고 거듭 청했고, 나는 끝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하고 나면 귀갓길이 어색해질 것 같았다. 주눅 든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주눅이 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촬영은 나 몰래 계획되어 있었다. 그녀의 친절은 나를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조금 씁쓸했다.
얼떨결에 캔디안 댄스를 배웠다. 전통 타악기 '베라'의 반주에 맞춰 손끝에 의식을 두고, 팔과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삐걱거렸지만, 숙련된 무용수들과 함께 호흡하다 보니 조금씩 동작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왕 시작한 거 대충 하고 싶지는 않아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 정도로 열심히 췄다. 내가 사랑하는 캔디에서 유래된 춤을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이 스리랑카에서 즐거운 추억이 될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영상 촬영을 마치고, 산지와니 씨는 수강생들과 함께 마을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했다. 오랜만에 몸을 써서 피곤했기에 얼른 집에 돌아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푹 쉬고 싶었지만, 마을 탐방 제안도 거절하지 못했다. 학원을 나가려는데, 산지와니 씨의 신발이 없어졌다고 했다. 결국 찾지 못해 수강생 중 가장 연장자인 남학생 라히루가 자기 슬리퍼를 그녀에게 빌려주었고, 그는 맨발로 걸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원래 맨발로도 잘 걸어 다니지만, 흙바닥이 험하고 돌이 많아 맨발로 걷는 그가 안쓰러웠다.
마침, 한 수강생의 집을 지나가게 됐다. 나는 산지와니 씨에게 귓속말로 "라히루가 발 아플 것 같은데, 신발 하나 빌리는 게 어떻겠어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세상에, 너 정말 다정하다. 라히루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나는 라히루의 신발을 빌려 신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라히루에게 슬리퍼를 돌려주었고, 수강생 집에 들러 신발을 빌려 신었다. 산지와니 씨는 나의 세심함에 감동했다며 나에 대한 호감을 적극 표현하면서 마을의 구석구석을 열심히도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끌려다녔더니 금세 밤 9시가 됐다. 그런데 집에 갈 때는 산지와니 씨 남편의 오토바이를 타라는 게 아닌가. 늦은 시간이라 버스는 끊겼고, 이 동네는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오토바이가 가장 일상적인 교통수단이라 해도 외국인인 내게는 그렇지 않다. 스리랑카에 살면서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한 게 바로 오토바이다. 아무래도 오토바이는 위험하니까 절대 타지 않으려고 하는데, 당장 가능한 교통수단이 그것밖에 없다니 난감했다.
만원 버스에 매달려 무용 학원에 왔고, 원하는 대로 홍보 영상도 찍었고, 가자는 곳은 다 따라다니며 친분 과시에 응했다. 여기까지는 잘 참았는데, 오토바이 타는 것만큼은 끔찍이도 싫었다. 그것도 위험하게 남편, 사마디, 나까지 세 명이 한 대에 동승해야 한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탔을 텐데, 외국인이라 까다롭다고 오해받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으니 오토바이를 타야 할 텐데 굳이 사람들 불편하게 화내서 뭐 하나 싶어 자포자기 심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언제 또 오토바이에 세 명이 타보는 경험을 해보겠어요. 한국 가서 자랑할 수 있게 안전운전 해주세요."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산지와니 씨는 헤어지기 직전 나를 꽉 안아주며 말했다. "너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야. 너를 만나서 기뻐." 그녀는 내게 다정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다정함으로 보였다니 무안했다. 다정함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내어주는 것인데, 나는 그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억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나의 다정함은 진심이라기보다는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가식에 가까웠다. 관계를 지키고 싶어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본심을 내밀었을 때 상대의 냉담한 반응으로부터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다정함을 흉내 내버렸다. 나는 연약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다. 진정 다정한 사람은 겉과 속이 같은 산지와니 씨가 아닐까. 그녀는 매사에 솔직했고 주저 없이 감정을 드러냈다.
운전자 뒤에 내가 탔고, 내 뒤에 사마디가 탔다. 오토바이는 우리 셋을 싣고 출발했다. 바람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셋이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인가?'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에게 무정한 사람이 어찌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을까.
다정이라는 가면으로 스리랑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토바이는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기 위해 허공에 얼굴을 내밀었다. 새까만 밤, 오토바이 위에서 간절히 바랐다. 불어오는 찬 바람이 나의 부끄러움을 식혀주길. 노력으로 만든 다정함이 언젠가 자비심으로 곧게 자리 잡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