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Galle)는 한여름이었다. 캔디에서 갈레에 도착하자 갑자기 계절을 건너간 듯 전혀 다른 온도가 나를 반겼다. 하숙집이 있는 캔디는 산간 지역이라 연중 내내 선선한 편이다. 캔디의 산들바람이 볼을 부드럽게 스치는 고운 바람이라면 남서부 해안 지역 갈레의 바닷바람은 인도양의 수분을 머금어 몹시 후덥지근한 바람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녹초가 될 정도로 더웠다.
이 뜨거운 도시에 온 이유는 순전히 사헬리 때문이었다. 콜롬보 농학교에서 봉사하면서 만난 아이가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을 넘겼다. 사헬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손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집에서 그림을 그려 갈레 기념품 가게에 납품한다고 했다. 다른 여자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집 안에만 있거나, 일찍 시집가는 현실에 비하면 사헬리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사헬리 같은 장애인 예술가를 발굴하고, 수공예품 판매를 도와 자립을 지원하고 싶어 사헬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아쉽게도 사헬리가 그림 그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원래 사헬리네 집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갈레 역에서 가까운 사촌 언니네 집에서 자는 걸로 갑자기 변경됐다. 그 집에는 사촌 언니, 언니의 두 딸, 그리고 언니의 엄마이자 사헬리의 이모까지 여자 넷이 살고 있었다. 오늘은 사헬리, 사헬리 엄마, 그리고 나까지 여자 일곱이 옹기종기 모여 자게 됐다. 사촌 언니의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살림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내가 조금 더 편히 지내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촌 언니 집으로 초대한 것 같아 고마웠다.
한국 과자를 선물로 건넸다. 아이들은 한국 것이 최고라며 극찬했다. 요즘 이 섬나라에도 K-푸드, K-뷰티, K-드라마, K-팝 같은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을 좋아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스리랑카 고유의 색이 옅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문화는 촌스럽고, 한국 문화가 우수하다고 착각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헬리는 전통 의상을 입은 옛 여인, 전통 무용을 추는 모습, 지역의 오래된 명소 등 주로 민속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사헬리의 손이 이 나라의 전통을 잘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헬리의 가족과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다. 밥을 먹을 때도 찰칵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나중에는 내 아이폰이 화질이 좋다며 내 것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스리랑카에서 아이폰이 부의 상징이라 그런지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보였다. 친오빠로부터 물려받은 중고 제품이지만, 해명해 봤자 그런 선물을 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도 사치가 될 뿐이었다. 그게 조금은 속상하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보지 않고, 나의 국적과 물건만 보는 것 같아서.
사촌 언니는 내가 싱할라어 하는 모습을 남편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며 나에게 전화기를 내밀었고,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름 모를 타인과 영상 통화를 했다. 혹시 사헬리의 가족들도 외국인의 껍데기만 보는 걸까. 나는 그저 기념품처럼 잠깐 보여주기 위한 존재일까.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 뻔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사헬리는 내가 오래전에 준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울 때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 특별한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공유하고 싶어서 사진을 남기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는 갈레 포트(Galle Fort)라고 불리는 해안 요새를 산책했다. 예전에도 갈레에 온 적이 있는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유럽풍 건축물 때문이었다. 그건 식민 시절의 잔해다. 스리랑카는 1505년부터 1948년까지 무려 443년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식민 지배를 당했다. 갈레는 여전히 서구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유럽인을 겨냥한 고급 식당이나 상점이 즐비하고 물가도 그에 맞춰 조성됐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유럽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외국인이 많이 오는 덕분에 사헬리가 그림을 팔 수 있다니 그만큼은 고마웠다.
밤이 깊었다. 사헬리와 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수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사헬리가 머리 옆에 손가락을 모았다가 바닥으로 뿌렸다. 그건 내가 스리랑카 수어를 까먹었다는 뜻이다. 장난스레 웃는 사헬리의 얼굴 뒤로 실망한 기색이 비치는 듯했다. 전하고 싶은 마음이 손끝으로 흘러가지 않으니 답답하고 미안했다. 수어를 잊었을 뿐 마음은 그대로인데, 사헬리는 내가 변했다고 생각할까. 그동안 내가 친구들이 변했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그들의 한쪽만 보고 단정 지었던 건 아닐까. 마음이 시끄러운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캔디로 돌아가야 하는 나를 사촌 언니가 갈레 역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언니는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두 딸과 풍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스리랑카에는 차를 가진 여성도, 운전하는 여성도 흔치 않다. 나는 언니의 운전 실력에 감탄하며, 차가 있으니 어디든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니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자유롭지 않아. 혼자 떠날 수 있는 네가 부러워."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남편은 의처증이 심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영상 전화를 걸어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했다. 어제 화면에 나를 비춰 보인 것도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그런 거였다. 남편의 전화를 받지 못하면 집착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언제 울릴지 모르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불안하게 산다고 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자기 이름으로 당당히 살고 싶다고 말하는 언니의 모습이 날개 잃고 땅에 주저앉은 새처럼 서글퍼 보였다.
해외에서 성공한 남편, 깨끗한 새집, 능숙한 운전. 스리랑카에서 그런 모습으로 사는 여성이 흔하지 않기에 은연중에 그녀가 자유롭게 산다고 오해하고 말았다. 그건 스리랑카 사람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유하다고 착각하고, 스리랑카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면서 내가 그 판단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겉모습만 보고 나를 정의하는 것 같으면 조용히 거리를 두곤 했다.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은 내어주지 않은 채.
껍데기는 눈에 쉽게 띄지만, 알맹이는 깊이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소라 껍데기 속 파도 소리처럼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마음의 소리도 있다. 사람들이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조금씩 마음을 열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내가 이 섬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껍데기 너머를 보며 살아가고 싶다. 나도, 타인도, 이 섬도 모두 껍데기 속에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아직 세상에 꺼내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진짜 이야기가, 누군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