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 살다 보면 현지인들로부터 집 초대를 자주 받는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 좋은 업을 쌓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손님을 맞이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집에 가면 늘 같은 일을 겪는다.
1. 집에서 사진을 수십 장 찍는다.
2. 그들의 친척들과 영상통화를 한다.
3. 동네를 돌며 이웃들에게 인사한다.
4. 이웃들과도 1번과 2번을 반복한다.
5.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음식을 먹는다.
그 사이, 나는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저는 싱할라어를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말로 재롱을 부린 대가로 각종 먹을거리를 입에 문다. 아무리 배가 부르다고 말해도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주는 대로 다 먹어야 한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동물원에 온 관람객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비슷하다. 동물원에는 철창이라도 있어 동물을 마음대로 만질 수 없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철창도 없이 내 피부와 머리카락을 만지며 나를 끌고 다닌다. 나는 목줄 없는 애완견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그게 싫지는 않았다. 외국인이 집에 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니까 사람들의 들뜬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여주기 창피해서 꼭꼭 숨겨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자랑거리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집에 방문하는 날은 친구들이 마을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사람들에게 외국인과의 친분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한국에서 온 선생님이에요. 저를 보러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 선생님 스리랑카말 되게 잘해요." 비록 내 몸은 피곤했지만,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스리랑카에 돌아와 최대한 많은 집에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모국어 환경이 아닌 곳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예전에 살 때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겪던 일이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되자, 그들의 열렬한 관심과 따뜻한 환대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환대는 나와의 시간을 추억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시하기 위한 것 같을 때가 많았다. 나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친구들 집에 가는 일에 점차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루나 언니네 집에 초대받았다. 카루나 언니는 스리랑카 국립 연구소의 홍차 연구원이고, 내 친구 셰한 씨의 아내이기도 하다. 셰한 씨는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이다. 내가 홍차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더니, 셰한 씨가 스리랑카에 가면 자기 아내를 만나보라며 연결해 줬다. 그렇게 카루나 언니의 친정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다. 언니네 집은 캔디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탈레(Matale)에 있었다. 외국인을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길래 정서적 소란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갔다.
언니는 부모님과 친오빠 부부, 다섯 살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가본 집 중 가장 넓고 깨끗한 전원주택이었다. 카루나 언니와 어머니는 평생 소리 한 번 질러본 적 없는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고, 언니의 조카가 말썽을 부려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일어난 유일한 소란은 신발장에 있는 내 신발이 자꾸 엎어져 있는 것이었다. 범인은 조카였다. 내 신발에 개구리가 들어갈까 봐 걱정되어 일부러 뒤집어 놓은 거라 실토했다. 그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는 그 집에 있는 동안 내 신발을 계속 뒤집어 두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편했다. 당연히 마을을 한 바퀴 돌 것이라 예상했는데, 언니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시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먼 길을 혼자 찾아오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냐며 내 몸 상태를 계속 살피고는 잠시 눈을 붙이라며 낮잠 시간까지 줬다. 스리랑카에서 낮잠을 권하는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었다. 남의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집의 안락함에 녹아들었는지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다.
식사 시간도 평화로웠다. 언니의 어머니는 같은 재료를 두 가지 방식으로 요리하셨다. 하나는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채소, 다른 하나는 그들이 평소 먹는 방식으로 요리한 반찬이었다. 스리랑카에서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은 처음 먹어봤다. 외국인인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왠지 건강한 음식을 좋아할 것 같아서 이렇게 준비했다고 했다. 내가 배부르다고 하면 더 먹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시종일관 외국인인 나를 배려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족과 함께 알루 위하라(Alu Viharaya Rock Cave Temple)라는 바위 사원으로 야간 산행을 다녀왔다. 부처님의 말씀을 야자 나뭇잎에 기록한 패엽경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사원으로 저명한 곳이다. 친구들과 사원에 가면 나를 앞세워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식의 특혜를 요청해 곤란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혹시나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언니네 가족은 달랐다. 이미 주지 스님과 인연이 있어 패엽경 만드는 방법을 보여달라고 직접 청해준 덕분에 얌전히 제작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고, 만수무강의 의미가 담긴 패엽 하나를 선물받는 영광까지 누렸다.
집에 돌아온 후, 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생에 가족이었을 거야.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렇게 편안한 걸 보니 분명 좋은 인연이었어." 나도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보다 하루 본 언니가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말처럼 우리는 전생에 가족이었을까. 이렇게 조용한 집에서 차분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번 생에도 얼마든지 가족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한 하루였다.
언니네 식구들은 이미 가진 것이 많아서 그런지 굳이 과시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교양과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투, 교육 수준, 식탁에 오르는 음식에서 그런 분위기가 묻어났다. 배려심은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는데, 내심 그들의 넉넉함이 배려심을 만들었다고 짐작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풍족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다. 모든 배려가 부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어느새 그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한 밤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늦은 밤에도 느닷없이 음악을 틀고 춤을 추고 내게도 무언가 선보이라고 조르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다시 그런 밤을 견딜 수 있을까. 사진 촬영, 영상 통화, 끊임없는 자기소개, 현지어 농담, 야밤의 장기자랑. 스리랑카 친구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쑥스럼을 무릅쓰고 했던 모든 행위에는 분명한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카루나 언니네 집에서 조용한 하루를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한 건 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세심한 배려였다는 것을.
이 섬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우정을 맺었다. 그건 그들의 가난을 함께 떠안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공감과 책임감은 호수처럼 잔잔한 환경 속에서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기보다는 그 고통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카루나 언니처럼 조용히 나를 배려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어졌다. 나의 무의식 너머에는 안락함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나는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