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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지상으로

by 미누리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간다. 스리랑카 하숙집 한 달 살기가 끝났다. 캔디에서의 마지막 아침, 늘 그렇듯 바지런하게 흰옷으로 갈아입고 캔디 호수로 향했다. 잔잔한 수면은 하얀 구름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고귀한 호수의 침묵에 나의 마음도 잠잠해졌다. 오늘만큼은 그 찬란한 빛이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저 고운 물결을 당분간 눈에 담을 수 없다니 가슴 속에 아쉬움이 번졌다. 호수를 도는 버스의 요란한 경적마저 작별의 선율처럼 서글피 들렸다. 두고 갈 캔디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참 무거웠다.


호숫가의 파란 뚝뚝은 딴따단- 으로 시작하는 경쾌한 소리로 아이스크림 판매를 알린다. 호숫가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가족, 데이트하는 연인, 쓰레기 줍는 학생들,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흰옷을 입고 조용히 걸었다. 사람들과 가볍게 주고받는 눈인사 속에서 행운을 예감하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도시 곳곳을 거닐며 자연과 사람과 소리 없이 유대했다. 매일 흰옷을 입고 걷던 외국인은 사라져도, 캔디는 남은 이들과 함께 역동적인 하루를 이어갈 것이다.


시내에 들러 한 달간 지낸 마히네 하숙집에 선물할 전기 주전자를 샀다. 그들이 손잡이가 깨지고 뚜껑이 헐거운 낡은 주전자로 물을 끓이던 모습이 내내 마음 한쪽에 걸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차 한 잔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래 쓸 수 있도록 조금 더 튼튼하고 견고한 걸로 골랐다. 내가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매일 차를 마시며 비슷한 일상을 보내리라. 훗날 물을 붓다가 나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 머문 흔적이 그렇게라도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하숙집은 손님이었던 사람이 가족이 되고, 가족이 된 사람이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는 특별한 안식처다. 사실 이 땅의 실소유주는 따로 있다. 마히네 식구들은 막대한 임대료와 세금을 부담하며 하숙집을 운영한다. 둘째 동생 말리떠가 유일하게 밖에 나가 돈을 벌지만 다섯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빠듯하다. 나도 방세를 내기는 했지만, 그건 한 달 치 식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금액이었다. 어떻게 가족에게 돈을 받냐며 내게 방세를 절대 받지 않겠다고 연신 손을 저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잴 수 없는 사랑이 깃든 곳이었다.


나는 방랑자였고 그들은 붙박이였다. 스리랑카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쏘다니는 나와 달리 하숙집 식구들은 문밖을 나설 여유가 없었다. 마히네 부모님은 거동이 불편해 계단 하나 오르는 것도 힘겨워했고, 닐루 이모는 자폐 아들 마두랑거를 돌봐야 했고, 니만띠 마담은 아픈 남편 세너커 씨 곁을 지켜야 했다. 요즘 들어 세너커 씨의 병세가 깊어져 응급실에 가는 일이 잦아졌는데, 마당에 구급차가 들어온 날에 하숙집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식탁에서 남편의 전화 한 통에 다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던 마담의 뒷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집에서 가장 낮은 곳에 내 방이 있었다. 태어나 처음 살아본 지하였다. 햇볕이 들지 않았고, 습기는 벽을 타고 흘렀다. 하숙집에 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잠옷에 곰팡이가 슬었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자유롭게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으니까. 지상에 사는 하숙집 식구들은 지하 같은 하루를 살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망에 걸려 있는 것처럼 자신이 딛는 지상을 마음껏 누비질 못했다. 나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들은 피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마음을 짓눌렀다.


혼자 바깥바람을 쐬고 오는 게 미안해 음식으로 갚아보려 했지만, 매번 열 명의 몫을 챙기는 건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소박한 것들을 입에 슬며시 넣어주는 걸로 대신했다. 마두랑거에게는 초콜릿을, 세너커 씨에게는 과일을, 아세니에게는 인도 간식을 건넸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은 나를 방으로 불러내 뭔가를 입에 쏙 넣어주곤 귓속말했다. "너만 주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나도 똑같이 웃으며 조그만 간식을 건넸다. 그렇게 몰래 음식과 마음을 주고받았다. 다정한 도둑질로 배부른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울 것은 우리가 함께했던 식탁일 것이다. 눈 뜨자마자 즐기는 따뜻한 차 한 잔, 부엌에서 풍겨오는 카레 향, 함께 나누는 따뜻한 식사, 식탁 위를 오가는 정겨운 대화. 언젠가 손으로 생선 가시 바르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맨손으로 살을 발라 내 밥 위에 올려주었다. 그런 따뜻한 손길을 잊지 못하리라. 내가 이곳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이 안에 사는 사람들의 자비로운 마음 덕분이었다. 소란하지만 다정한 집이었다.


각기 다른 방에 살았지만 우리 사이에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보다 서른 살은 족히 많은 여인들과 친구가 되어 고민을 나눴다. 문화 차이와 세대 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화의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함께 흘러갔다. 비록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방이었지만,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자랐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고 나누던 자비는 이 세상 그 어떤 햇살보다 밝고 찬연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저마다의 작은 빛을 모아 세상을 밝히는 일인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스리랑카 이주민들과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스리랑카 하숙집에서는 잘 살아내면서, 한국에서 스리랑카 사람들과의 동행은 뭐가 그리 어려워 쩔쩔맸을까. 악의 없는 거짓말과 미묘한 거리감에 수없이 휘청였고, 현생에 그림자처럼 붙은 전생의 업보는 마음 깊숙한 곳에 죄책감을 남겼다. 세 번째 스리랑카에서도 이전과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마주하며 흔들릴 때가 있었지만 나를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진 못했다.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한바탕 파도가 휩쓸고 간 섬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조금씩 사람들을 이해했고, 내 안의 편견과 화해했다. 때로는 무례하거나 불쾌하게 느껴졌던 사람들의 모습도, 그 이면에 감춰진 강인함과 연약함까지도 사랑하게 됐다. 혹여나 스리랑카 사람들이 미워지는 날이 오면 하숙집에서 못난 외국인을 부드럽게 감싸안아 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나를 따뜻하게 품어준 우리 집처럼 나도 경계에 선 존재들을 끌어안는 은신처가 되리라.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세속 너머로. 이제는 조금 더 맑고 투명한 세계로 걸어가려 한다. 나는 스리랑카에서 이방인이었고, 봉사자였고, 여행자였고, 세속인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미누리였다. 그리고 이제 수행자로 살아보려고 한다. 내 마음에 뿌리내린 스리랑카의 자비가 언젠가 또 다른 땅에서 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스리랑카 절에 들어간다. 정든 자리를 떠나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지만, 이제 나는 내가 가는 길이 또 하나의 연대임을 안다.


세 번째 스리랑카의 전반부가 막을 내렸다.

보통의 한 달 살이와는 조금 다른 30일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단기 출가와는 다른 38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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