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뚝과 옆구리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그건 생전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간지러움을 동반했다. 며칠 전 놀러 간 집의 수돗물에서 녹슨 내가 심했던 게 떠올라 수질 변화로 인한 두드러기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안일하게 넘겼는데, 가려움은 점점 심해졌고 발진은 일정한 선형을 그리며 진해졌다. 수십 개가 넘는 반점이 생겼다. 그제야 나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너저분한 곳에 서식하며, 일정한 형태로 사람의 피를 빨고, 극심한 가려움을 일으킨다고 했던 곤충. 이건 빈대의 소행이 확실했다.
도대체 어디서 물린 것일까. 그동안 친구 집을 순회하며 타던 값싼 버스, 친구들의 허름한 집,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재우던 침대, 그리고 집을 비운 사이 바뀐 하숙집 침대. 모두 위생이 청결하지 않음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하랴. 내가 옮은 것인지, 옮긴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원인을 찾는 것보다 더 이상 옮기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갖고 있는 모든 옷을 손빨래해 햇볕에 널었고, 물린 상처에는 현지 약국에서 산 약을 발랐다. 다행히 추가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조심해야 할 것이 빈대뿐이겠는가. 자연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벌레와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숙집은 호숫가에 가까운 데다 마당에 큰 하수구가 있어 습한 편이다. 내가 쓰는 방은 지하다 보니 유난히 눅눅하다. 개구리, 지렁이, 전갈, 거미 같은 각종 생명체가 방에 놀러 오곤 하는데, 나는 그들의 깜짝 방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렀다. 불자가 지켜야 하는 오계 중 첫 번째가 바로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하숙집에서 살생은 암묵적인 금기다. 나는 자비심을 키우려고 애썼지만, 그 녀석들과의 동침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부엌에는 엄지손가락보다 큰 바퀴벌레가 득실하지만 아무도 내쫓지 않는다. 그들은 밤새 부엌을 활보하다 아침에 불을 켜면 슬그머니 몸을 숨긴다. 나는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일부러 혼잣말로 등장을 예고한다. "흠흠, 차 한 잔 마시러 부엌이나 들어가 볼까나?!" 그건 그들이 갑자기 놀랄까 봐 인기척으로 배려한 것이 아니라, 미처 숨지 못한 커다란 덩치를 보고 화들짝 놀랄 나를 배려한 것이다. 스리랑카에 살다 보면 앞으로 더 많은 불청객의 방문을 겪을 텐데 나는 그들을 환영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필요해진 나는, 예전에 봉사했던 장애인 학교를 다시 찾았다. 마침 신학기를 맞아 열린 입학식 행사에 초대받았다. 학교 강당에는 수십 명의 신입생과 학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의 학교 소개와 선배들의 환영 인사가 이어졌고, 교장선생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나도 단상에 올라 짧은 축사를 했다. 이 학교에서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여러분도 부디 많은 배움을 얻길 바란다고. 진부하지만 진심이 담긴 인사를 전했다.
우리 학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특수학교다. 재학생의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고, 전교생에게 숙식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집에서 장애인 자녀를 돌볼 여력이 없는 가난한 부모들은 직업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자녀를 기숙사에 맡긴다. 1년 뒤 학생들의 손에 쥐어지는 졸업증은 장애인에게 더 엄격한 취업 시장에서 자신의 성실함과 독립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력이 된다. 그러니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이곳에서 버텨야만 한다.
입학식이 끝나고 신입생은 기숙사 침대를 배정받았고, 학부모는 그들의 짐을 내려주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둘 울기 시작했다. 한 소녀는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엄마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나도 데려가세요."라며 울부짖었고, 사감 선생님과 나는 그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곡소리를 듣다가 문득 졸업식 전날 밤이 생각났다. 그때 아이들은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들도 처음 학교에 들어올 때는 집에 가고 싶어 울지 않았을까. 이번에 입학한 아이들도 나중에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기도했다.
부모와의 이별로 슬픈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왔다. 화장실 물이 끊긴 것이다. 지난 학기에 입학한 학생들은 단수가 일상이라며 태연해했다. 나도 단수를 수시로 겪었다. 전기 없는 삶보다 물 없는 삶이 훨씬 혹독했다. 특히 용변 처리가 문제였다. 목욕은 줄여도 용변은 줄일 수 없지 않은가. 물이 나올 때마다 겨우 받아놓은 흙탕물을 바가지에 받아 변기 물을 내렸다. 화장실 바닥에는 늘상 흙때가 꼈다. 싱크대에서 지렁이 사체 수십 마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 적도 있다. 하숙집은 그때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나약하다. 한국의 편리함에 안주해 버린 탓일까.
하숙집에 돌아오자, 낮 동안 잊고 있던 가려움이 덮쳐왔다. 나는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빈대에 물린 자국을 벅벅 긁어댔다. 모기는 염치가 있어서 윙윙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배부르면 그만 먹기라도 하는데, 이놈의 빈대는 조용히 기어나와 규칙적으로 수십 방을 무는 게 괘씸하다. 빈대에도 자비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몸집도 작은 게 번뇌를 가져다 주니 얄미워 죽겠다.
잠에 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이다 내가 어찌 빈대 앞에 떳떳할 수 있나 싶었다. 나야말로 하숙집에 빈대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에서 스물여덟 번째 밤을 보내고 있다.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면서도, 낯선 환경에 새로 적응할 자신이 없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나의 터전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나른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이대로 안주해선 안 된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더 연약해질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하숙집에 기대어 있을 수는 없는 법. 애초에 스리랑카 두 달 살기 중 절반은 수행하겠노라 굳게 마음먹고 온 것이 아니던가. 이제 때가 되었다. 출가(出家)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포근한 한국 집을 떠났고, 따스한 하숙집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안락과 고통의 저울질에서 벗어날 것이다.
고작 빈대에 무너질쏘냐. 나는 고생할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물어뜯고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나는 빈대에게 생명수를 주었고, 빈대는 나에게 출리심(出離心)을 주었다. 서로에게 더 잘 살아갈 힘을 주었으니 이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