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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Mar 10. 2023

목격자가 아닌 동행자로 살아가길

월간 옥이네 2019년 12월호(VOL.30)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건 분명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세상에는 이런 개척자가 많습니다. 돌아보면 옥천에도 있지요.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은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역사회에서, 정책에서, 우리 인식에서 지워졌던 장애인의 삶과 권리를 새기는 활동을 지난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이어왔습니다.     


강산은 한 번 변했지만 센터는 수차례 지역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장애인 야학을 세우고 자립을 위한 체험홈을 열었습니다. ‘장애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요구한 결과 교통약자이동증진센터가 설립되고 장애인 콜택시가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학수고대하던 저상버스가 드디어 도입되기도 했고요. 군 단위 지자체에서는 드물게 옥천군이 자체 예산을 들여 부부 장애인과 홀몸 장애인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추가 지원하는데, 이 역시 센터를 중심으로 한 장애인권 활동가들이 이루어낸 성과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만 쓰면 그저 몇 줄,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짧은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싸운 시간은 결코 짧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뙤약볕에 휠체어로 일반버스를 타는 ‘버스 타기 운동’이나 ‘전동휠체어 트레킹’ 같은 이동권 투쟁은 당시만 해도 옥천 사람들에겐 ‘듣도 보도 못한’ 충격이었습니다. 활동지원제도의 불합리한 조사 방법이나 부양의무제 등도 이들이 아니었다면, 비장애인 동네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는 어려운 문제였을 겁니다. 무엇보다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보던 시선을 바꿀 수도 없었겠지요.     


몰랐던 세계와의 만남은 장애 당사자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 인식의 지평은 10년 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가준 이들 덕에 우리는 참 많은 것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겨우 저상버스 1대로 호들갑이냐고.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지역사회의 변화는, 10년 전 옥천이 그리지 못했던 것을 꿈꾸고 전망하게 했다는 데서 그 의미가 깊습니다.     


이 변화를 함께 목격하고 기록할 수 있어서, 또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어서 가슴 뛰는 2019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현장의 변화와 감동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아쉬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올해 월간 옥이네에 담을 수 있어 무척 영광입니다. 더불어 월간 옥이네 지면을 통해 아직 다 다루지 못한 무수히 많은 개척자들, 우리 우주의 지평을 넓혀준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이 길의 목격자가 아닌 동행자로 함께 살아가기를 기원하며, 변화를 이끄는 이들을 기억하며,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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