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는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리 Mar 10. 2023

오늘 저녁은 따뜻한 밥 한 공기를

월간 옥이네 2019년 11월호(VOL. 29) 여는 글

어릴 적 추억의 상당 부분은 ‘할머니 댁’과 연결돼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거의 매주 주말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갔기 때문이죠. 야트막한 비탈 밭에서 할머니의 밭일을 거들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조금 떨어진 논에서 잡초를 뽑던 할아버지. 그 너머 지나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흙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논에 들어가 메뚜기를 잡기도 했고요.     


그렇게 논밭을 놀이터 삼아 놀다 해가 떨어지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죠. 그 밤, 낡은 흙집의 방 한편에 모여앉아 보던 9시 뉴스도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기억에 남아있는 뉴스의 몇 장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농민들의 시위 모습입니다. 뻘건 글씨로 무언가를 휘갈겨 쓴(나중에 알았는데 그게 바로 ‘UR 반대’ 같은 문구였습니다) 누런 쌀 포대와 나무 팻말 같은 것을 들고 화를 내던 까무잡잡하고 주름진 얼굴이, 제 기억 속 한 장면으로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소리치는 걸 보면 무언가 심각한 일인 거 같은데, 그때는 그저 재밌는 장면 중 하나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의 의미를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고요.     


요즘 부쩍 그때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장면을 신기하게만 바라봤던 저도 떠오르고요. 그러면서 종종, 해 질 녘 논 옆에 서서 담배를 태우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는 옆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 어렸고, 또 너무 무지했으니까요.     


이 모든 기억을 길어 올린 건 다름 아닌, 최근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뉴스였습니다. 농민단체의 반대 기자회견, 규탄 집회 모습이 짧게 지나가고 그저 ‘반발하고 있다’ 정도로 처리되는 뉴스를 보며, 어릴 적이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언론 보도가 이러니 농업농촌의 현실을 돌아보긴커녕 농민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힘듭니다. 이 와중에 ‘솔직히 우리가 개도국은 아니지 않냐’는 반응까지 나옵니다.     


‘쌀’ 문제, 참 어렵습니다. 우리 농업과 농민이 처한 현실이 어렵고, 이 복잡하고 속 터지는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저 역시, 농부 할아버지를 뒀지만 대부분의 삶을 도시에서 보낸 만큼(지금은 읍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여기가 농촌은 아니니까요) 쌀 문제를 설명하는 것도, 그 어려움을 체감하는 것도 벅찹니다.     


그럼에도 월간 옥이네 11월호에서는 ‘쌀’을 이야기해봤습니다. 우리 농업이 처한 어려움을 담기엔 제 배움도, 지면도 미천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농민들의 시위를 그저 신기하게만 바라보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다른 깨달음을 던져줄 수 있기를 바라며 펜을 들었습니다. 부족하나마, 더 나은 앎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라봅니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어떨 땐 한 끼도 쌀밥을 먹지 않는 날이 있으니까요. 일단, 오늘 저녁은 따뜻한 밥 한 공기 지어먹어야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러는 사이 지구는 이만큼 뜨거워졌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