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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Mar 11. 2023

우리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

월간 옥이네 2020년 4월호(VOL.34) 여는 글

불과 한 달 반 전, 그러니까 2월 말에서 3월 초를 지나던 당시엔 막연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날이 풀리고 꽃이 피는 4월이 되면 이 사태가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3월을 지나는 사이 전국 학교 개학은 한 번 더 연기됐고, 물리적 거리두기 역시 4월 19일까지 더 연장됐습니다. 여전히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5월이나 6월에도 나아질 거란 기대를 갖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완전 종식은 내년이 돼야 가능하리라는 의견과 매년 유행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고요.     


당장 2020년의 봄이 뭉텅이로 날아간 듯한, 왠지 모를 억울함에 4월을 보내는 이들도 있을 듯합니다. 이 좋은 봄날, 흐드러진 꽃을 창밖으로만 바라봐야 하는 것에 못내 아쉬움이 따르겠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답답한 방호복을 입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물리적 거리두기로 지역사회 감염을 사전 예방하는 노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지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가보지 않은 길이라 쉬이 그려보긴 어렵지만, 확실한 건 이 같은 질병 X(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인간이 망쳐놓은 지구 생태계는 전염병이 계속 번질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만들었으니까요.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사회 공공의료체계를 촘촘히 세우는 것만큼 기후위기 대책이 심각하고 시급하게 진행돼야 할 이유입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춘 가운데에도 시간은 흐릅니다. 이렇게 4월이 왔고,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할 것들을 불러냅니다. 제주 4·3 항쟁과 세월호 참사는 4월을 지나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망각도 함께 가져오는지라,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쉽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해 6주기를 맞는 세월호 참사의 공소시효가 단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망각이 가져온 부끄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운 일은 또 있었습니다. 텔레그램으로 성착취 동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한 조주빈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발언권을 주고 그 말을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을 보면서, 한참 후진적인 취재와 보도 행태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동영상 공유방의 존재를 알리고, 이 사건을 배정받은 오덕식 판사를 교체한 일 등 이를 공론화하는 과정 전반에 시민들의 힘이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진정한 봄이 올까’하는 회의감에 빠졌다가도 ‘그래도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헤어 나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가오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집니다. 코로나19가 모든 의제를 덮은 지라 총선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게 떨어진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표소로 향해야겠지요. 내년 봄에는 세월호 참사의 의문을 해소했기를, n번방을 비롯한 모든 성범죄를 제대로 처벌했기를,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이 조금 더 빨라졌기를 바라며. 그런 바람이 투표소로 모여들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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