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괜찮았던 것일까.
나는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세세한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나는 머리가 나쁜 것일까? 하는 생각도 오래 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보이는 것들은 회색빛을 띄고 있는 기억들이 많았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그랬다. 특별히 좋은 기억도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울하고 어둡기만 한 유년기를 보냈나?라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뭐.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닌가?
나는 내가 좋은 환경과 따스한 부모 아래에서 마음 건강하고 편안하게 자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에 아주 심각하고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내 감정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춘기 즈음에서는 짜증이나 불만도 많았는데, 그 시기에는 어느 집의 아이든 다 그러한 것 아닐까.
그리고, 솔직히 죄다 회색빛인 것은 아니었다. 나름 그중 어느 여름날의 초록빛도, 햇살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엄마의 몸에 푸르스름한 멍자국도. 붉은 피도.
사실, 멍자국은 내 기억이 맞는데, '흥건했던'붉은 피가 내 기억인지 내 동생의 기억인지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어느 날 동생이 그랬다.
"나는, 방바닥에도 흐르던 엄마의 빨간 피가 아직도 선명하고 잊히지가 않아."
당시 동생은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동생의 기억 속 그날, 아마도 아버지는 유리컵 등을 던져서 깼을 것이고 엄마는 밀쳐져서 밟거나 해서 피가 났을 것이다. 상황은 나도 기억이 나고, 피가 보였던 것도 바닥에 묻어있던 것도 기억은 나는데. 그게 그렇게 심각하던 것이었나?
동생의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왜 내 기억은 죄다 이렇게 흐리멍덩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그날은 내가 아마 중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거다. 내가 기억하기도 전의 아주 어린 날부터, 엄마의 몸에는 가끔 멍자국이 생겼다. 한 집에서 사는 어린 나는 그 상황을 모두 다 고스란히 지켜봤을 것이다.
'또 시작이구나.'
그 시절에도 이미 지긋지긋해진,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패턴이었기에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같은 날이었는지 비슷한 시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술과 화에 취해 눈이 뒤집힌 아빠에게 (거의) 처음으로 대들었던 것 같다.
나도 조금은 커졌고, 반항심 가득한 사춘기였고. 혼자 주먹을 휘두르던 수준을 벗어나서 그날은 피도 좀 봤고. 엄마에게 휘두르던 주먹을 보고 내가 그 앞을 가로막았던 것 같다.
쳐 봐. 엄마에게만 그러지 말고 나를.
아빠고 뭐고 바로 신고할 거야. 폭력범으로.
그 생각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했고, 얼핏 '네가 아빠에게 어떻게 그래!'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아버지는 차마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는 못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내가 직접 맞은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어느 날, '폭력에 맞은 사람도, 그것을 보면서 자란 사람도 모두 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름 큰 충격이었다.
나는 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내가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서 그런 상황을 지켜봤더라면, 그 폭력 현장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를 피해자라고 걱정했을 거면서.
왜 과거의 나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