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넘치는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이. 03
"딸(네 엄마)의 집에 갔더니 장롱에 구멍이 있더라고. 그걸 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어렸던 네 언니가 '아빠가 주먹으로 그랬다..'라고 설명을 하더라고."
나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 내 동생에게 하셨던 이야기 중 하나라고 했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이야기. 나에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이야기였다.
어느 말의 끝에 나왔다고 했더라.
내 동생과 외할머니 둘이 아빠에 대한 소재를 이야기로 했을 것 같지는 않고(누군가와 대화 하기에 그리 좋은 소재도 아니다). 어린 시절, 지금과는 다르게 수다쟁이였고 말을 곧잘 하고 설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한 이야기 끝에 나왔을까?
교통도 불편했고 거리가 있으니 1년에 한 번 딸의 집을 방문하시는 것도 어렵던 때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았던 내 외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에 집중이 되어서, 동생이 이야기해 주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전셋집의 방 문 중 하나에는 반 구멍이 나 있었다.
"뭐지 이건? 생뚱맞게 이런 곳, 문짝 한가운데가 왜 이래.?"
"주먹으로 친 거지 뭐."
"그걸 어떻게 알아?"
"뻔하지 뭐, 비슷한 흔적 많이 보기도 했고. 어릴 때 우리 집에 이런 것 많았거든. 장롱 문짝 하나하나마다 새로 생겼고. 이사 가서 새 장롱이 생겼을 때도 머지않아 또 생겼고."
대수롭지 않은 척.
아니, 어릴 때부터 많이 봐오던 흔적이었으니까 정말 대수롭지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그 흔적 위에 구구단 등의 포스터를 붙여서 가려버렸다.
어차피 얼마나 살게 될지도 모르는 전셋집에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내 아이들은 이런 흔적이 낯설어서 다행이야, 그 정도의 감정이 전부였다.
나에게 외할머니는 그저 '따스함'이었다. 일 중독이셨지만 내가 가면 늘 예쁘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던 분. 그런 외할머니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셨는지는 모른다. 사위의 폭력의 방향이 가구나 가전으로만 향했을 것이라 애써 생각을 하셨을까, 혹은 본인 딸의 몸으로도 향했다는 것까지 알고 계셨을까.
내 엄마의 성격상 죽어도 그런 말을 직접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하지 않으셨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어린 손녀의 앞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위를 평생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들만 귀했던 시대에 나는 여자아이였음에도 첫 손녀였기에 정말 많이 예뻐해 주시던 분이었고, 그 애정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런 손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마냥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외할머니의 마음이 그 순간에는 얼마나 무너졌을까.
지금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저 너무 슬퍼서 목이 멘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을까. 여느 이야기들처럼 그저 해맑게, 내가 아는 정보를 외할머니에게 자랑하듯 이야기를 했을까? 아니면, 내가 아는 비밀을 외할머니에게만 말해주겠다며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했을까.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어렸던 내가 안쓰럽다.
어쩌면, 외할머니의 마음은 내 생각보다 무덤덤하셨거나 그저 잠시 속상함 한 움큼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눈에는 외할머니는 폭력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어찌 되었든 나와 너무 거리가 먼 시대의 삶을 살면서 나와는 다른 것들을 경험하셨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내 주관적 시선에서 보이는 외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슬퍼져서.. 마음이 자꾸 가라앉고 숨 쉬는 것이 무거워진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을 떠올릴 때면 덤덤한데, 그 근처 주변인들을 생각하면 종종 마음이 너무 아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