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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달 Aug 01. 2022

'품위 있는 그녀' 그 뒤의 엄마

다 큰 어른의 어리광도 괜찮다.


오래전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를 재미있게 보았었다. 제목 그대로 그녀의 품위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무척 멋있게 다가왔던 드라마였는데, 


힘든 일이 생겼을 당시 주인공 김희선 님이 친청엄마 앞에서 완전 아기 같은 모습으로 투정을 부리고 밥을 얻어먹는(받아먹었던가..) 장면과, 그 뒤에 친정 엄마가 사위의 내연녀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장면에서는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아니 어떻게, 본인 스스로도 그렇고 남들 앞에서도 그렇고 저런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엄마 앞에서는 이렇게나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인지. 


엄마는 그걸 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부 다 받아줄 수 있는 것인지. 주인공은 저렇게 고상한데 엄마라는 사람은 왜 저런 것인지. 저런 엄마 아래에서 어떻게 주인공 같은 멋있는 딸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기반한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였기 때문에, 내 시선에 그 장면들은 오류였었다.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그 드라마를 보았을 때에는 처음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집안에 큰일이 생기고 남편이 바람이 나서 다들 허둥대고 화를 내며 어찌할 줄 모르던 상황 속에서, 감정을 정리하고 하나씩 일을 해결해 나가는 그 멋있는 모습 뒤에는 마음껏 투정 부리고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면 다 해 줄 수 있는 믿음직하고(여기서 믿음직스럽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해결은 안 되더라도 나 대신 내연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주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였다는 것. 


그렇게, 무조건 내 편인 엄마가 있었기에 주인공은 '품위 있는 그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이 힘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모든 순간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때론 할 수 있는 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을 것이고, 그런 날에 그저 웃으며 내가 다 해 주어도 아이들은 스스로 잘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더 잘 자랄 수 있었을 것인데 나는 아이가 한 사람의 온전한 몫을 못 해내는 사람으로 클까 봐 불안함에 더 다그쳤던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은 나에게는 책을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감정을 다 내보이고 투정을 부리며 그것들이 수용된 기억이 없었으니까.

내 여러 가지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도, 아이의 그러한 것들을 받아주는 방법도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드라마 주인공 엄마의 모습을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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