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식구(食口)’라 부른다.
우리 집 식구 중 하나인 ‘까미’는 이제 제법 나이가 든 노묘다. 십 년 넘는 세월을 함께하며 녀석은 고양이의 본능 위에 영악한 인간의 심리 하나쯤은 덧씌운 듯한 묘한 존재가 되었다.
까미와 소통하는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역시 간식 시간이다. 나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츄르를 손에 들고 곧바로 내어주는 법이 없다. 녀석의 간절한 눈빛을 즐기며 나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을 건다.
“까미야, ‘사랑해요’ 해봐.”
녀석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면 나는 한술 더 뜬다.
“그것도 못 해? 그럼 ‘멍멍’ 해봐. 고양이도 이제 제2외국어 하나 정도는 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야. 자, 따라 해 봐. 멍~ 멍~.”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내 만담에 자지러지지만, 까미는 빨리 달라는 듯 발치에서 연신 몸을 비비며 보챈다. 그럴 때면 녀석은 기가 막히게도 ‘하아-’ 하고 사람 같은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저 인간,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명확한 한숨 소리에 나는 결국 항복하며 간식 그릇을 내려놓는다.
까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감정이 있다.
반가울 때 내는 높은 음의 인사, 뭔가를 바랄 때 내는 낮고 길게 늘어지는 간절함, 그리고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가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내는 낮고 묵직한 “너희 어디 있어?”라는 부름까지. 그 소리들은 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 가족이 귀에 익힌 녀석의 언어였다.
사건은 우리 식구가 까미만 빼고 여행을 떠났던 그해 겨울에 터졌다.
가족만큼 가까운 아내의 친구에게 녀석을 맡겼다.
그녀와의 인연은 까미가 우리 식구가 되기 전부터 이어져 왔다. 처음 까미를 보았을 때, 자기 집에도 고양이를 들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다. 다만 “까미 같은 아이는 찾기 힘들 것 같다”며 웃곤 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 뒤 이틀, 까미는 우리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국의 땅에서 카카오톡 통화로 전해오는 소식은 당혹스러웠다. 혼자 남겨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평소 정갈하던 녀석이 화장실 밖에 변을 보고는 발로 문질러 놓았다는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츄르도 거부한 채 차가운 현관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웅얼웅얼”거리기만 한다는 소식에 여행지의 밤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울은 추울 텐데.’ 걱정이 앞섰지만, 밖으로 나가 자유를 찾겠다는 녀석의 강력한 욕구와 고생하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에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까미는 영하의 한파가 몰아치는 집 밖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갔다. 지독히도 추웠던 그 한겨울, 까미는 과연 어떤 자유를 누렸을까. 그녀는 매일 단지를 돌며 목이 터져라 “까미야!”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집사가 아닌 이의 목소리에 반응할 만큼 까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엉망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분노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아내와 나는 번갈아 단지를 돌며 까미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린 겨울바람뿐이었다. 귀국 이틀째, 그리고 가출 9일째,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집안의 난장판을 치우기 시작했다.
“까미 화장실 깨끗하게 치웠으니까 이제 들어오겠다.”
아내의 그 터무니없는 믿음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집 나간 고양이가 화장실 청소 상태를 어찌 알고 돌아온단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잊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열자, 그곳에서 꾀죄죄하기 짝이 없는 까미가 어그적 걸어 들어왔다. 며칠 사이 홀쭉하게 마르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와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워진 모습이었지만, 그 녀석이 거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 얼어붙었던 집안에 비로소 훈풍이 돌기 시작했다.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한참 동안 전화를 끊지 못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던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 이틀과 그 아홉 날을 함께 견딘 살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까미는 이미 우리만의 고양이가 아니었다.
녀석과 함께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식구’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 공간에 사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없으면 허전하고, 아픈 모습이 보이면 종일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다. 녀석은 그 시린 겨울의 자유보다, 때론 귀찮게 ‘제2외국어’를 강요하고 츄르 한 봉지에 애를 태우게 만드는 이 시끄러운 가족의 품이 더 그리웠던 모양이다.
지금 까미는 지독했던 겨울 외출의 기억을 모두 잊은 듯, 내 발치 아래 웅크리고 앉아 기분 좋은 골골송을 부르고 있다. 녀석의 몸에서 전해지는 낮은 진동음이 내 발등을 타고 올라온다. 이 진동이야말로 우리 집 식구가 모두 모였다는 신호다. 나는 다시 츄르 한 봉지를 들고 녀석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한다. 조만간 까미를 진심으로 아껴준 그 소중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제대로 대접해야겠다고.
“까미야, 이번엔 영어로 해볼까? 아이 러브 유, 해봐.”
까미는 대답 대신 길게 하품을 하며 내 발등에 머리를 기댄다. 그래, 그거면 됐다. 너는 이미 사랑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