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억, 지명이 알려주는 시간의 흔적

by 누룩취

우리는 매일 길을 묻고 주소를 적으며 수많은 이름을 입안에 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부르는 그 지명들이 사실은 수백 년 전 그 땅의 운명과 역할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간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지명은 단순히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 마모되고 문헌이 소실된 곳에서도 그 땅이 품었던 삶의 결을 읽어낼 수 있게 하는 가장 정직하고 끈질긴 기록물이다. 지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꺼운 역사서를 뒤지지 않아도 그 지역이 지나온 과거를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나에게 지명이란 곧 내가 태어난 곳의 뿌리이자, 머무는 터전이며, 지나온 삶의 궤적을 잇는 이정표이다.


나는 전라도의 어느 작은 마을 ‘교리(校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나의 세계는 마을 입구의 거대한 당산나무에서 시작되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그 나무를 지나 완만한 고개를 오르면 웅장한 기와지붕의 향교가 나타났다. 그 너머엔 깊은 저수지가 있었고, 굽이진 산길을 더 오르면 공동묘지가 펼쳐졌다.

아이들에게 공동묘지는 공포의 대상이라지만, 나에게 그곳은 겨울날의 놀이터였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면 비닐포대 하나를 달랑 들고 올라가 묘지 사이를 가로지르며 눈썰매를 타던 추억이 서려 있다. 죽은 자들의 공간이 산 자의 아이에게는 가장 즐거운 활강로가 되어주었던 셈이다.

나의 지명에 대한 관심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내가 사는 고을이 아닌 다른 지방에도 ‘교리’라는 똑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어렸던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작은 충격이었다. 내가 태어난 고유한 세계의 이름이 실은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보편적인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교육을 숭상했던 조상들의 정신은 마을 이름에도 깊이 각인되었다. 낯선 고을에서 ‘교동(校洞)’이나 ‘교리(校里)’를 만난다면, 그곳은 과거 지방 교육 기관이었던 향교가 자리했던 곳이다. 향교는 공자와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인재를 가르치던 곳으로, 이 지명들이 남아있는 마을은 그 지역의 문화적·정신적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원동(書院洞)이나 학동(學洞) 역시 사설 교육 기관인 서원이 있었거나, 당대의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후학을 가르치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지금은 낭랑하게 울려 퍼졌을 글 읽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지명은 그 땅이 추구했던 최고의 가치가 ‘학문’과 ‘예절’이었음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준다.


지명에 대한 관심은 성인이 되어 나의 삶이 옮겨가는 곳마다 이어졌다. 나의 신혼 생활은 경기도 산본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둔전초등학교’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학교 이름인가 보다 했으나, 훗날 그것이 그 땅이 품었던 역사적 소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행정명으로는 사라졌을지 모르나, 학교의 이름으로 남은 '둔전(屯田)'은 이곳이 과거 군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구었던 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몇 년 전, 나는 전남 진도 ‘둔전리’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다. 산골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늘 바닷가를 동경해 왔고,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욕심에 덜컥 일을 저질렀다. 거실에서 바라보면 개간되어 구역정리가 잘된 논 너머로 조그맣게 바다가 보인다. 걸어서 5분만 걸어나가면 만나는 바다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1년에 몇 번 놀러가는 바다와 생활의 터전에 대한 감흥은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은 바람도 제법 많이 분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 풍월재(風越齋)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바람은 많고, 터는 넓고 잡초도 많다. 하루 종일 내려다보는 길에는 지나가는 차는 있을지언정 사람은 귀하다. 서울과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고, 이제는 불편해진 몸으로 넓은 시골집을 관리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과제가 되었다. 낭만적인 애물단지가 된 셈이다.

사전은 둔전을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 건조한 정의 뒤에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분투가 숨어 있다.

조선 시대, 변방의 군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국가의 지상 과제였다. ‘둔전’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군인이 갑옷 대신 베옷을 입고 삽을 들었으며, 때로는 인근 농민들이 땅을 부치며 수확물의 일부를 바쳤던 자급자족의 현장이었다. 오늘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둔전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과거 병영이나 수영이 근처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군사적 흔적은 바다로 눈을 돌리면 더욱 명확해진다. 부산의 수영구(水營區)는 조선 시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자리 잡아 남해안을 지키던 곳임을 이름 그 자체로 웅변한다. 경남의 통영(統營) 역시 과거 전라·경상·충청의 삼도 수군을 총괄하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지도 위의 짧은 이름들이 사실은 바다를 지키던 판옥선의 노 소리와 수군들의 함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지명 중에는 당시 고을을 다스리던 행정 시스템의 핵심을 보여주는 이름들이 유독 많다. ‘훈리(訓里)’나 ‘동헌리(東軒里)’라는 지명을 만난다면, 그곳은 과거 수령이 집무를 보던 관아의 핵심 건물인 동헌이 있던 자리이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을 둘러싸고 행정의 실무 공간과 수령의 내아가 배치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고을의 위계를 보여주는 ‘객사리(客舍里)’와 ‘향청리’이다.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물이었기에 대개 지역의 가장 중심지에 위치했다. 한편, 지역 양반들의 자치 기구였던 향청이 있던 향청리 주변은 자연스럽게 양반들이 모여 살던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국가의 안녕을 빌던 사직동(社稷洞)이 더해진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은 관아 근처에 엄숙하게 자리 잡고 고을의 풍요를 기원했다. 반면, 죄를 다스리던 옥거리나 옥동(獄洞)은 엄격한 법의 집행이 이루어지던 장소로, 대개 관아 근처에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이름이 합쳐져 하나의 고을이라는 거대한 행정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과거의 교통 체계 역시 지명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역촌(驛村)’이나 ‘역리(驛里)’는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원들이 말을 갈아타던 역(驛)이 있던 곳이다.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역관들의 분주함이 가득했던 이곳은 규모가 꽤 컸으며, 서울의 역촌동처럼 오늘날에도 교통의 요지로 남은 경우가 많다.

역과 짝을 이루는 것이 바로 ‘원터’ 혹은 ‘원동(院洞)’이다. 관리들이 머물던 공공 숙소인 원(院)이 있던 자리로, 우리가 익히 아는 조치원, 사리원, 이태원, 퇴계원의 '원'자가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이태원의 화려한 풍경 아래에는, 수백 년 전 괴나리봇짐을 멘 나그네와 관원들이 지친 발을 쉬어가던 주막과 숙소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모여 삶의 활기를 나누던 경제 중심지도 이름 속에 살아있다.

‘장(場)’자가 들어간 지명은 과거에 정기적으로 장이 서던 곳이다. 지금은 주택가가 되었을지라도, 예전에는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고 물건을 사고팔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장림, 장동, 장터들이 있다.

‘창(倉)’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를 의미한다. 조세로 거둔 곡식이나 군량미를 저장하던 국가의 핵심 창고가 이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창동(倉洞), 창리(倉里)가 있다.

이처럼 장과 창이 생활의 맥박을 보여준다면, 성내와 읍내는 권력과 방어의 중심을 드러낸다.

지금은 성곽이 사라졌어도 이곳이 과거 읍성 안쪽의 핵심 주거지이자 방어와 행정의 핵심 공간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성내(城내), 읍내(邑內)가 그 흔적들이다.


우리는 흔히 유물이나 문헌 속에서만 거창한 역사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부르는 지명은 그 어떤 유물보다 강력하고 생생하게 과거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무너지고 도로는 새로 닦이며 지형조차 변할 수 있지만, 지명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 땅의 ‘첫 번째 소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증언한다.

표지판에 적힌 이름을 가만히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일은, 현재 우리가 딛고 선 공간을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그 땅이 품어온 수백 년의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다. 지명을 살펴보는 행위는 단순히 옛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 속에 박제된 조상들의 숨결을 오늘로 불러오는 경건한 역사 여행이다. 이름은 변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의 변화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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