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의 역설

by 누룩취

초봄 새벽 공기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폐부를 찔렀다. 어제의 기억은 깨진 유리 파편처럼 머릿속을 굴러다니고, 입안은 모래를 씹은 듯 거칠다. 숙취는 단순한 통증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 내가 부린 호기에 대한 정직한 형벌이다. 나는 무거운 외투를 여미며 습관처럼 단골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뿌연 김이 안경알을 덮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찰나의 정적 속에서 훅 끼쳐오는 것은 쿰쿰하면서도 구수한 육수의 향이다. 고추기름의 매콤한 기운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뚝배기가 가스 불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안경을 닦고 시야를 확보하자, 그곳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새벽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 쪽 테이블에 앉은 인부들이었다. 흙먼지가 묻은 작업복을 입은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뚝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장국은 속풀이 이전에 생존을 위한 연료다. 거칠게 썰어 넣은 고기 건더기를 씹으며 그들은 밤새 소진한 체력을 다시 채워 넣는다. 그들의 수저는 쉼 없이 움직였고,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뚝배기 바닥을 긁으며 내는 둔탁한 소리와 뜨거운 국물을 들이킬 때마다 깊은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대척점에는 젊은 커플이 앉아 있었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그들은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어제 어떤 뜨거운 감정을 쏟아냈는지, 혹은 날이 밝으면 타인이 되어야 하는 예정된 소외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들은 그저 뚝배기에서 올라오는 김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국물만 떠먹을 뿐이다. 그들에게 식탁 위의 해장국은 대화가 끊긴 정적을 메워주는 유일한 도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 옆 테이블에는 나처럼 혼자 온 사내가 있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끓어오르는 뚝배기를 응시했다. 수저를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그 국물 속에 자신의 잃어버린 무언가가 빠져 있기라도 한 듯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가끔 울리는 휴대폰 알림에도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점원을 불렀다. “여기 소주 한 병 주쇼.” 그 목소리에는 체념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드디어 내 앞에도 뚝배기가 놓였다. 보글거리는 국물 위로 큼지막한 선지와 쫄깃한 양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한술 크게 떠서 입에 넣는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닿는 순간, 굳어 있던 내장이 이완되며 비명을 지른다. ‘어~!’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비로소 어제의 잔재들이 땀방울이 되어 이마로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해장국은 본래 비워내기 위한 음식이다. 몸 안에 켜켜이 쌓인 알코올을 씻어내고, 흐릿해진 정신을 맑게 깨우기 위한 정화의 의식이다. 하지만 국물을 마실수록 몸은 기묘한 반응을 보인다. 비워진 자리에 다시 무언가를 채우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이 꿈틀거린다. 칼칼한 국물은 혀의 감각을 예리하게 돋우고, 부드러운 내장은 빈속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이때부터 해장국은 더 이상 해장국이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술국’으로 변모한다. 속이 풀리는 바로 그 찰나, 뇌는 “이제 한 잔 정도는 괜찮다”는 위험한 전언을 보낸다. 어제의 고통을 잊기 위해 찾은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고통의 근원을 갈망한다. 이것은 미련함인가, 아니면 생의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인가.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비워내고 다시 새로운 욕망을 채워 넣는 존재다. 술을 깨기 위해 먹는 음식이 다시 술을 부르는 이 해학적인 행위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속성과 닮아 있다.

사랑에 데어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겪고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다시는 도전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도, 어느새 신발 끈을 고쳐 매는 것 또한 인간이다. 해장국 한 그릇에서 술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타락이 아니다. 그것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남긴 빈자리에 새로운 온기를 채워 넣는 과정이다. 해장국은 그 비어버린 공간을 가장 따뜻하고 치열하게 채워주는 매개체다. 국물 한 모금에 어제를 용서하고, 술 한 잔에 오늘을 기대하는 행위는 그래서 숭고하기까지 하다.


옆 테이블 사내의 잔에 투명한 액체가 채워진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잔을 비우고는 뜨거운 국물을 한 국자 떠먹는다. 그의 표정은 아까의 멍함 대신 생경한 활기로 채워진다. 나 역시 점원을 부를까 고민한다. 이 뜨거운 국물을 두고 맨 정신으로 나가는 것은 이 음식에 대한 결례가 아닐까 하는 핑계가 머릿속을 스친다.

가장 맛있는 술은 해장술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가장 찬란한 회복을 꿈꾸며 마시는 한 잔. 해장국집을 가득 채운 이들은 모두 각자의 뚝배기를 앞에 두고 자신만의 비움과 채움을 실천하고 있다.


식당 문을 나설 때, 새벽의 칼바람은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몸 안에는 뜨거운 국물과 어쩌면 한 잔의 술기운이 돌아 든든한 방어막을 형성했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다시 채워진 힘으로 오늘이라는 전장으로 나간다.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이 구차하면서도 뻔한 반복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테이블 위에는 빈 뚝배기만 남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다시 살아갈 욕망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이제 다시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