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푹푹 나리고, 세상이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밤이었다. 시인 백석은 홀로 앉아 소주를 마시며 나타샤를 생각했다. 그가 마신 것은 투명한 액체가 아니라, 쩡쩡 얼어붙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자, 멀리 있는 연인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그리움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방에서 술은 유일한 온기였고, 그 온기는 고스란히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치환되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 화가 김환기는 둥근 항아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흙이라는 차가운 물질이 어떻게 사람의 손길을 거쳐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을 품게 되었는지, 그 신비에 경탄했다. 무심한 흙에 생명과 온기를 불어넣는 것,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이 빚어낸 기적이었다. 그는 백자를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체온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백자의 곡선에서 여인의 부드러운 어깨를 보고, 백자의 피부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김환기는 백자에 체온이 담긴 것에 경탄했다. 나는 술에 담긴 그 체온을 마신다.”
백석의 시 구절을 떠올리며, 나 역시 술잔을 기울인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은 독한 알코올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먼저 앓았던, 서늘하고도 뜨거운 온기다. 백석이 느꼈던 그리움, 그가 느꼈던 경탄, 그리고 김환기가 느꼈던 매혹… 그 모든 감정이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백석의 소주잔에는 나타샤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고, 김환기의 백자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 술잔에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온기가 담겨 있다.
독한 알코올의 화끈거림 뒤에 밀려오는 묵직한 온기. 그것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위로이자, 희망을 품게 하는 격려다. 누군가 먼저 앓았던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온기를 마시며, 나는 다시 한번 살아있음을 느낀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밤, 나는 술잔에 담긴 체온을 마시며, 누군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