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정점을 지나 이제는 더 빠른 속도로 미끌려 내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손님이라지만, 그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만큼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남기는 이 기록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은 한 인간의 간절한 당부다.
그것은 스스로 마지막을 정리할 수 없는 내가 남긴 부채이기 때문이다.
먼저, 나의 의식이 안개 너머로 사라져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면, 부디 콧줄(L-tube)이나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지 말아 다오. 인간에게 식사란 단순한 열량의 주입이 아니라, 맛을 음미하고 온기를 나누는 즐거움이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 갇힌 내 육신에 강제로 영양을 공급하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멎어야 할 시간을 억지로 늘리는 가혹한 고문일 뿐이다.
숨을 기계에 맡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삶의 마지막 장면이 투쟁이 아닌 평온이기를 갈망한다. 요양원에서 모르는 이의 손길에 내 치부를 내보이거나 기계음이 가득한 중환자실의 차가운 금속성 소리 대신, 내가 사랑했던 이들의 숨소리와 창가에 머무는 햇살 속에서 조용히 스러지고 싶다.
나의 마지막 옷차림에 대해서도 당부한다. ‘수의’라고 불리는 생소하고 빳빳한 삼베옷 대신 내가 평소 즐겨 입던, 편안한 일상의 옷을 입혀다오. 어차피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질 육신에 불편할 것이 뻔한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부질없는 낭비다. 나는 유물론자로 살아왔다. 죽음이란 원소들이 다시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러니 그 어떤 종교적 형식이나 사회적 허례허식에 나를 가두지 마라. 화려한 꽃장식도, 거창한 제단도 필요 없다. 그저 너희만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고를 널리 알리는 일 또한 삼가 주었으면 한다. 몇 년에 한 번 간신히 안부나 주고받던 이들에게 나의 부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예의로 오가는 조문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 혹여 나에게 서운함을 품었던 이가 있다면, 그 감정조차 그대로 두어라. 미안함과 화해를 강요하는 죽음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장례식장은 울음이 아닌, 낮은 선율의 음악이 흘렀으면 한다. 내가 좋아했던 음악들이 퍼지고, 너희는 그 안에서 슬픔보다는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기억들을 반추하기를 바란다.
나는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의 마지막을 늘 흠모해 왔다. 그는 백 세가 되던 해,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주변을 정돈하며 삶을 마쳤다. 삶을 충분히 누렸노라고,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비워주어야 할 때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뒷모습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웠던가. 나 또한 그렇게 ‘방을 깨끗이 비우고 떠나는 손님’처럼 가볍게 가고 싶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물질의 순환이다. 내가 입던 옷, 내가 읽던 책, 그리고 너희의 기억 속에 남은 나의 조각들이 곧 나다.
조용한 음악을 틀어다오.
그리고 미련 없이 나를 놓아다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죽음이 물질의 순환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믿는다. 오래전 이백 또한 같은 마음으로 달 아래 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긴 시 중 유독 마음이 머무는 시를 한 수 함께 나눈다.
삼월의 함양성에
온갖 꽃이 대낮에 비단과 같네.
누가 능히 봄에 홀로 근심하는가?
이런 풍경 대하면 곧장 술을 마시네.
빈궁과 영달, 장수와 단명은
조화에 의하여 일찍이 마련된 것.
한 잔 술에 죽음과 삶이 같아지니
모든 일이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네.
취한 뒤에는 천지도 잃어버려
멍하니 외로운 베개를 베는구나.
내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이런 즐거움이 최고의 기쁨이로다.
三月咸陽城 千花晝如錦
誰能春獨愁 對此徑須飮
窮通與修短 造化夙所稟
一樽齊死生 萬事固難審
醉後失天地 兀然就孤枕
不知有吾身 此樂最爲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