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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페이사쥬 Beau paysage

가치관이 180도 바뀐 초자연적 생산자

by nuseat


드디어 만났다.

아직도 보페이사쥬를 못만났다고하니 전화로 지금 가면 줄 수 있냐고 다른 바사장님께 연락 취해주신
나카무라상에게 무척 큰 은혜를 받았다...


Le vent 2018

카버네소비뇽 _ ' 피라진을 이렇게 우아하게 뽑아낸다니..'

유일무이한 맛이라고 하니 사장님이 '모든 와이너리가 유일무이한 맛이죠'
라고 한것처럼,,

다음날 또가서 먹은 피노누아는 그저 각자의 취향이 있는거라 생각되었다




Beau paysage

(아름다운 풍경)


야마나시 호쿠토시 츠가네津金 에 있는 와이너리.
자연이 와인을 만든다는 사고로, 츠가네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와인을 만들어 내고있다.


생산자 오카모토 에이시 岡本英史 (1970년생)
31살에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고도800m에서 밭을 개척해 메를로로 시작 ,피노누아, 까버네소뇽, 샤르도네등을 재배한다.

와이너리는 2001년에 시작되었다.
농약, 아황산염 일절 무첨가로 수확량은 아주 적은 양으로, 고요한 작업을 하며 원시적인 방식으로 스텐 체위에 포도를 굴려 열매를 분리하고 고대문헌을 보고 만든 나무재질의 작은 손 압착기를 쓴다

병입은 낙차를 이용한 사이폰방식으로 천천히 1병에 1분정도씩 걸린다,,
수도물에는 염소를 제거해쓰거나 세척용은 반드시 우물 물을 쓰는등 상상이상으로 손이 많이가는 일들을 하고있다.

저널리스트나 프랑스생산자로부터 세계 어디에도 없는 양조방식이라는 말을 듣는다.





야마나시 양조대학원에서 만난 절친들이
키도와이너리의 키도상, 오부세와이너리의 소가상(한살후배)
셋은 일본의 양조가 아사이 우스케麻井宇介의 영향을 받아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에서 서구품종 (비니페라종의)포도 재배를 실현한 살아있는 전설들,

우스케보이즈라 불리고 영화화되었다.

{아사이우스케 麻井宇介 (1930-2002)

펜네임이고 본명은 아사이 쇼고 浅井昭吾라고 함,
샤토메르시앙의 와인, 위스키 양조가로, 이사를 역임,
야마나시 와인주조협회장 이었다.

메이지와 쇼와 중기에 걸쳐 스윗와인용 품종인 콩코드나 나이아가라의 큰 산지였던 나가노 시오지리시의 키쿄가하라 桔梗ケ原지역에 본격적인 레드와인용 비니페라품종 재배연구에 들어가 1985년 품질이 우수한 '키쿄가하라 메를로' 와인을 탄생시키고 코슈 슈르리 양조기술등을 주변와이너리에 공개하고 전파해 일본 와인산업을 부흥시키기기 위해 노력하였던 분이다.}



유니콘 와인이 되버린 오카모토상의 보페이사쥬.

반면, 오카모토상의 스토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다.

그의 대학원 시절에는 오카모토 자신도 소가 아키히코 에게 '일본에서 와인만든다는건 바보야. 일본에서 좋은 포도가 나올수가 없으니까. 와이너리를 한다면 캘리포니아에서 만들고 그걸 운송해와서 항구가까이에서 만들어야되' 라고 주장했던 사람 ..그럼 소가상은 자신은 본가와이너리가 부정당하는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반론하곤 했다. 하지만 대학원 교수님조차 비니페라종을 재배해도 일본에서 와인이라니 안되라고 했었다는..

오카모토상은 처음엔 아내와 동료들 4이서 시작했지만 밭임대, 대출조차 조사공무원이 여기서 포도 재배는 안될거라며 심사해 받을 수 없었고 그런 시간동안 못견딘 동료 둘은 안좋게 떠났다.

포도를 심고서도 자라는 몇년은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 혈연지연도 없는 야마나시에서 아내와 2001년까지 3년간 문화유적발굴 시급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식비만 충당했고 99,2000년은 오부세에 포도를 갖고가 양조를 하게 도움받았는데 2001년은 수확량이 늘어 나가노까지 운반하기 곤란해졌다. 생활고등으로 지친 아내도 이혼을 하고 떠나갔다.

그때는 와인도 팔리지않고 레스토랑에 영업을 가면 두고가세요 라고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파쇄기도 쓰고, 아황산염도 쓰고 교과서대로의 작업을 했었다.
게다가 처음의 컨셉은 츠가네에서 2000엔대의 테이블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사이 선생님도 떠나신 2002년,

혼자가 된 오카모토상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포도 하나하나를 살피고 보살피는 것에만 몰두한다. 4년동안 외부사람도 받지않고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대화했으며 오직 자연과 마주할 뿐이었다. 아사이우스케 선생의 책만 공부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양조가 바뀌고 평가가 좋아졌다.

진짜 포도의 우마미를 최대한 끌어내는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와인맛은 포도에게 맡길뿐, 자연은 나쁜것도 좋은것도 없고 토지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싶다는 것. 농약, 아황산염 일절 무첨가로 수확량은 아주 적은 양으로, 고요한 작업하며 원시적인 방식으로 스텐 체위에 포도를 굴려 열매를 분리하고 고대문헌을 보고 만든 나무재질의 작은 손 압착기를 쓴다

병입은 낙차를 이용한 사이폰방식으로 천천히 1병에 1분정도씩 걸린다,,
수도물에는 염소를 제거해쓰거나 세척용은 반드시 우물 물을 쓰는등 상상이상으로 손이 많이가는 일들을 하고있다.

한밭 당 수확량은 굉장히 적은데, 와인용 포도는 수량을 제한해 응축감있는 포도가 되게 하도록 하지만 오카모토는 자연히 적게 되버린다. 카키네(버티컬 슛 포지셔닝) 재배식보다 1/3 타나네(일본식 선반식)보다 1/5로 로마네콩티보다밭 보다 적은 수준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포도 한알한알을 오랫동안 보고 있는 오카모토의 모습을보면 제정신인가 싶기도하고

다이아몬드나 진주를 다루듯 한다고 말한다

의외인 모습의 대학시절 오카모토는 레스토랑 서비스직 알바를 시작했고, 버블경제때 그곳에서 남다르게 일해 큰 시급을 확보해 일터에서 만난 일잘하고 세련된 선배 사이토와 디스코 호텔수영장등 밤새 놀고 마시는 사람이었다 .

당시 오카모토는 바텐더가 되고싶었는데 사이토와 와인을 마시며 와인의 매력을 느끼게되었다.
언젠가 사이토와 함께 일하고 싶었고 독립하면 사이토에게 인정받고싶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던 사이토가

오카모토의 첫 와인이 만들어진 해 캘리포니아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살면서 큰 슬픔에 빠진 일중 하나라고 한다.

세명 중 가장 많은게 바뀐 게 오카모토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 지금의 모습과 가치관에서 예전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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