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는 어떤 김밥일까?
2000년대 중반 최고의 축구선수는 누구였을까? 나는 단연 지네딘 지단이라고 생각한다. 06년 월드컵 박치기 사건으로 감정 조절에 실패한 모습마저도 지단이기에 납득이 되기도 한다. 지단이 오죽했으면..^^ 지단이 그라운드의 사령관으로 누빌 수 있었던 배경에는 클로드 마케렐레라는 훌륭한 청소부와 티에리 앙리라는 확실한 공격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축구는 포지션마다 아주 뚜렷한 정체성이 있었던 것 같다. 1번 골키퍼를 시작해 6번은 아주 타이트한 청소부형 미드필더(마스체라노, 마케렐레), 9번은 킬러 (호나우도, 토레스), 10번은 예술가 (바조, 리켈메, 토티)로, 1번부터 11번까지 확실한 컬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10번 선수들은 '코스 요리를 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주방장' 같았다. "나는 오로지 파이널 패스만 찌를거야, 수비는 니들이 알아서해." 이런 역할이 존중받고, 그 자체로 가치 있고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요즘의 축구는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에서 공을 잡고 경기를 지휘하던 10번은 살아남지 못한다. 아스날의 메수트 외질의 한계, 논란은 있겠지만 유벤투스 시절 파울로 디발라 또한 비슷한 이유로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한다.
20년 전의 축구 선수를 식당에 비유하자면 이탈리안 레스토랑, 돈까스 전문점, 한정식집, 오마카세 등등으로 아주 특색이 있었다면, 지금의 축구 선수는 김밥천국이다. 공격수도 수비를 해야 하고, 수비수 심지어 골키퍼도 빌드업에 관여해야 한다. 미드필더는 말할 것도 없다. 수비와 공격 역할을 전방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사이드 플레이어들도 다르지 않다. 풀백은 중앙으로 들어와 빌드업을 하고 여차하면 슈팅까지 가져가야 한다. 윙포워드는 사이드에서 균혈을 만들어내면서, 팀의 주요 득점원 역할까지 해야 한다. (메시가 축구를 바꿔놨다.) 이런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데이터와 전술 분석의 고도화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약점 (쟤네 10번은 수비를 안 해, 쟤네 센터백은 발밑이 안 좋아 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전방위적인 움직임과 상황에 맞는 유연한 역할 수행이 필수적이다. 펩 과르디올라의 가짜 9번, 인버티드 풀백의 출현으로 대표되는 포지셔닝 플레이는 위와 같은 원인의 '현상'이다. 콘테의 3-5-2, 클롭의 게겐프레싱 또한 역할 분담보다는 공간의 활용과 공수전환 속도를 강조한 컨셉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유로 해석이 된다. 그 외에 피지컬 수준의 고도화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미식축구를 보면 전원이 아주 쫄깃한 피지컬을 가졌다. 부딪히면 최소 골절 ; 과거 축구는 포지션마다 체형이 아주 달랐다. 사이드 선수들은 키도 작고 슬림 했다. 센터백은 크고 육중했고, 미드필더들의 피지컬은 평범했다. 요즘은 다르다. 11명의 플레이어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과 체력, 피지컬을 갖추고 있다. 이강인이 커리어 초반 압박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후 피지컬을 키워 스텝 업 한 사례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다 보니 유소년 때부터 선수 육성의 방식도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다재다능하게 키워 특정 포지션보다는 축구 능력 전체를 키우려는 추세라고 본다.
그럼 앞으로의 축구에서도 계속해서 김밥천국형 축구선수가 각광받을까?
포지션보다 Role이 중요하고, 특정 툴만 보유한 선수가 아닌 다재다능한 선수가 계속해서 각광받을 것이다. 축구 클럽도 회사와 똑같다. 쓰임이 많은 인원이 중용 받을 것이다. 그러나 김밥도 맨날 같은 것만 먹을 순 없다. 참치, 치즈, 돈까스 심지어는 밥알이 없는 김밥도 나왔다. 개성 있는 김밥도 등장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축구도 같지 않을까? 개성이 있는 김밥이 잘 팔리듯이 전술 속에서 특화된 역할이 다시 빛을 볼 가능성도 있다. 클래식한 10번이 다시 등장할지, 마스체라노 같은 타이트한 수비형 미들이 다시 주목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패션의 유행이 돌고 돌듯, 김밥집 중에서도 특색 있는 김밥을 만드는 김밥집이 인기를 끌듯 축구에서도 클래식한 10번 혹은 9번의 역할이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기다려보겠다.
김밥천국에서도 돈까스만 오지게 잘 튀기는 직원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일반적인 김밥천국에서,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전문성과 창의성을 찾아
미슐랭 김밥이 되면 더 좋지 않아?
그럼 회사에서의 나는?
그냥 김밥이 될지 미슐랭 김밥이 될지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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