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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읽고

by 유영

오늘날에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 자연재해, 참사들을 접하다 보면 신은 왜 이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곤 한다. 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기아에 직면해야 하는가. 왜 약자들은 끝없이 고통받아야 하는가.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성당 옆에 놓인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은 다리가 무너지면서 죽게 된 사람들. 그들이 겪은 삶의 여정을 함께한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예정된 죽음이라는 결말에 반복적으로 도달한다. 그들은 어째서 죽어야 했을까. 그리고 왜 그들이었을까.


각 챕터별로 등장하는 세 인물의 공통점으로 이 물음에 답해보고자 한다. 그들은 모두 사랑을 했으나, 그 사랑은 불완전한 키치같은 사랑이었다. 불완전함은 그들의 외로움에서 기인하고, 외로운 개인은 혼자라는 두려움에서 피하기 위해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 특히 이런 성질은 피오 아저씨에게서 매우 잘 드러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한 인간상을 만들어 내고, 그녀가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녀의 연기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쏟아내는 모습. 심지어 천연두에 걸린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거부하자 그동아느이 빚을 갚으라 하는 장면 등. 피오 아저씨의 모습은 페리촐레가 자신에게 계속 의지하기를 바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에스테반과 마누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마누엘이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자 순식간에 분열하는 둘 사이의 관계는 그간 이루어진 형제간의 사랑이 자발적이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면, 에스테반은 마누엘의 사랑을 존중하고 그가 자신을 떠나가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며, 마누엘 또한 형제애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큰 고민없이 여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가 여인을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형제간의 사랑이 불완전한 사랑이었기에, 여인과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지닐 수 없었으며 형제와 여인을 모두 잃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후작 부인은 챕터 내내 그녀의 외로움과 집착적인 사랑이 눈에 띄므로 생략한다.


후작 부인,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지 못했고, 그 다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들의 죽음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삶을 함께 했기 때문이며,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왜 신은 이제야 깨달은 이들에게 죽음을 안겨주었을까.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변화했을 것이란 믿음은 어쩌면 작품 전반에 걸쳐 자리잡고 있는 신앙의 관점에서만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손턴 와일더가 고전적 양식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점과 당시 시대상이 세계대전을 겪고 있던 염세적 시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가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그들의 삶을 예상할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매번 다짐하는 목표들은 어김없이 봄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고, 삶에서 큰 좌절을 겪었을 때 느낀 간절함과 의지는 안정을 되찾으면 사라지는 우리의 모습처럼, 인간의 마음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렇기에 작중 인물들은 사랑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도 겉보기에만 변화처럼 보이는 시도를 했을 뿐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이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개인의 삶이 신의 의도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신의 의도에 대한 의심. 즉, 신에 대한 부정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신의 의도인가, 우연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변화와 죽음이 모두 신에 의한 것인지, 혹은 그저 평범한 인간들의 우연한 죽음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죽은 이들의 기록을 방대하게 정리하던 수사는 결국 신앙을 선택했으나,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화형을 당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가기에 기억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이 순간 우리의 사랑과 삶이 계획된 것이던, 그렇지 않은 우연한 것이던 우리는 허울없는 진정한 의미를 그려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순간에 솔직해지면 될 뿐이다. 바로 이 부분에 사르트르의 말이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이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지금 우리 자신이 존재하기에 종교, 사랑과 같은 수많은 가치가 우리에게 따라붙을 수 있고, 또한 우리가 그런 가치를 세계에 부여할 수 있다. 글을 다 쓰고 보니, 니체의 신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 실존의 뿌리는 이 소설에서 과도기를 맞은 것은 아닐까라는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어졌다. 신을 믿건, 우연을 믿건, 그 무엇도 믿지 않건,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진정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에는 힘이 필요하다. 그저 운명에 몸을 떠맞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주체성을 피우고자하는 의지와 그에 따라오는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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