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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킴 May 01. 2023

교정의사 2년 차. 육춘기가 오다.

삶의 의미와 주도적인 삶의 중요성

교정의사 수련의 과정을 끝내고 정식적인 교정의사로 일한 지 이제 2년 차가 끝나가고 있다. 교정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 하나로 치대 4년을 치열하게 다녔다. 그뿐만이었나. 교정의사 수련의 과정 속에서도 내 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거의 매일 학교병원에 밤 8-9시까지 남았다. 퇴근하려는 교정과 학과장님을 붙잡고 교정치료와 환자 케이스들에 대해 질문하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내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계시는 머리숱도 얼마 없으신 할아버지 학과장님을 보아야 아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구나를 깨달을 정도로 3년의 수련의 과정을 열정을 채워 빡세게 보냈다 (학과장님과 친해서 졸업하고도 가끔씩 만나는데, 나의 그랬던 모습들이 자기 딸들과 닮았다며 아직도 그걸로 조크를 많이 날리신다. 나는 오히려 죄송스러운 게 많아 선물공세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배워나가야 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치과 진료조무사들 (dental assistants), 실장, 매니저 (manager), 리셉션니스트 (receptionists), 등 나의 팀원들을 리드하고 좋은 팀워크를 배워야 했다. 치과병원 운영진들과의 상호관계와 재정관리, 전반적인 환자들 관리와 마케팅 등등 새롭게 배워야 할게 수만 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 혹은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보다는 이 새로운 것들을 얼른 배워서 내가 잘 활용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2년 차가 되다 보니 어느 정도 병원운영의 흐름을 이해하는 짬이 생기고 여유가 생겼다. 당연히 학생 때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하루하루 루틴이 자리를 잡았고 꽤 만족스러운 날들을 지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기력과 허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공부에 치여, 커리어라는 꿈을 좇기 위해 나를 갈아 놓다 보니 20살 청춘 맥시멈 시절 때 (나의 오춘기 - quarter life crisis - 시절) 그렇게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고뇌하던 그 거대한 물음표가 십여 년 만에 아주 오랜만에 내 삶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건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이 질문들의 작은 물줄기는 결국 큰 물을 만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고뇌하게 만드는 그 질문 바로

삶의 의미/목적은 무엇인가? 에 도달하게 된다.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내 인생의 방향성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인 방향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현재 먹고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알았고 계획했던걸 (공부와 직업) 순차적으로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 치이다 보니 한 발자국 물러나 더 큰 그림, 바로 내 삶의 방향성,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 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삶에 큰 결정을 내릴 때나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삶을 나가야 하는지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삶의 방향성이 없다 보니 당연한 거였다.

10대, 20대 때는 그리 어렵지 않다. 확고한 방향성, 삶의 목적이 없더라고 이미 부모님이 지나가신 길을 보며 따라가든지 사회가 만들어준 큰 틀 안에서 움직이면 됐다. 예를 들면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가서 본인의 전공을 공부하고 그 이후로는 더 공부를 하던지 취업을 하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돈을 많이 모아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고 삶을 마감하는 게 일반적인 사회에서 보이는 틀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틀의 삶에 큰 문제점을 못느끼는 것 같다. 굳이 머리아프고 골치아프게 이런 생각을 하냐며 내일 당장 해야하는 일부터 생각하라고 할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산다는 건 매우 일차원적이고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20살 때 이미 오춘기를 보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 건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내가 기존에 믿었던 종교에 대해 회의심과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때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건 까뮈 (Albert Camus)의 책들이었고, 실존주의 (existentialism)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당시 매우 염세적이고 비판적이었고 결국 모든 건 다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비싼 등록금내면서 수업도 안가 겨우 가까스로 졸업을 한건 안 비밀이다....)

종교와 삶의 의미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단 한가지 절대적인 진리 (the absolute truth)는 죽음이다. 모든 생물체는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모든 종교가 죽음 이후 사후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듯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대해서 어느 정도 대답을 알려준다.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쓰고 싶다.



우선 근본적으로 내가 무엇을 중요시 여기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생각해보고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모른다. 그걸 알려면 나 자신을 향해 질문을 해야 하고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하기 위해선 우선 생각을 해야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학습을 해야 한다. 마치 내가 어떤 영화, 영화 장르, 영화감독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수백 가지 혹은 수천 가지의 영화를 봐야 알 수 있듯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는 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 가?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고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도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충족된다.  왜냐면 결국 내 삶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닌 나 자신의 것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특히나 요새는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의 등장으로 더더욱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꽤 힘들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네이버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 접하는 많은 매체들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사용하는데 결국 우리는 이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영상들, 정보들로 노출이 되고 내가 원해서 내가 선택해서가 아닌 알고리즘이 제시한 걸 소비하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절대 멈춰주지 않는 다. 만약 내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내가 어떠한 삶,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내가 아닌 타인 (배우자, 부모, 등등), 사회 (우리가 속해있는 커뮤니티) 혹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비교적 쉽게 흔들릴 테고 아마 행복과는 꽤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우린 윤택하고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 물론 개개인마다 윤택함, 풍족함, 행복함의 정의가 다르고 사이즈도 다르겠지만, 나 자신에게 저런 질문들을 하지 않고 선 그러한 만족도가 높고 충족될 수 있는 삶을 살기엔 어려울 듯하다. 인간은 꽤 복잡한 생각의 동물이고 기계처럼 간단하게 input -> output으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 할수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들 중에 단순히 내가 무엇을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의 댓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 내가 그 특정한 선택을 내린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도적인 삶을 살지 않는 다면 내가 내린 결정/선택의 이유, 즉 더 크게 나아가 내가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 내 삶의 의미의 존재가 희미할 경우가 상당히 높다.


말콤 글래드웰 (Malcolm Gladwell)의 책 "아웃라이어 (Outliers)"에서 한 말이 있는데, 사람이 자기 직업에 만족감을 얻기 위해선 크게 3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걸 내 맘대로 그냥 내가 외우기 쉽게 ACC (Acceleration의 줄임말)로 외웠다:

A: Autonomy  (자율성)

C: Complexity (복잡함)

C: Connection between effort and reward (노력과 보상의 비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ACC는 직업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간단하고 매일 똑같다면 매우 진부 해질 테고 우린 미쳐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선택도 우리가 스스로 내리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점심 메뉴를 내가 못 고른다든지 핸드폰을 내가 원할 때 사용하지 못한다든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노력과 보상의 비례는 항상 존재한다 (저녁을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는 건 꽤 큰 노력과 또 시간이 투자되는 데 대신 집안이 깨끗해지고 정리정돈되어 잇는 부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하지만 난 말콤 글래드웰이 한 가지 빼먹었다 생각한다. 하나를 더 추가해서 ACC가 아닌 내가 만든 MACC.

M: Meaningfulness (의미)

A: Autonomy  (자율성)

C: Complexity (복잡함)

C: Connection between effort and reward (노력과 보상의 비례)

우리의 큰 삶의 틀이든 그냥 일상생활 속 작은 일이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의욕을 잃고, 게을러진다. 대학교 때 내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의미가 없는 삶,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삶, 혹은 나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주도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똑같이 주어진 시간속에 인생을 살아가도 행복함과 만족감은 얻는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뜻을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끝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 의미에 걸맞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절대적인 정답도 오답도 없다. 현재 나는 내 커리어 초창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러한 질문들을 하고 생각을 정리해보니 앞으로 내가 어느 길을 가야 하고 무슨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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