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사란 무엇인가?
1)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데 이 약점은 안타깝게도 의사라는 직업에는 더더욱 치명적이다. 철이 없고 사회경험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오죽했길래 나이가 들고 20대 후반이 돼서야 주위 친한 친구들이 농담이지만 아주 조금 진담을 섞어 "너 사이코패스 아니냐"라는 말을 들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축구부 (Varsity soccer)의 캡틴이었는데 토요일 아침 이른 경기 시간으로 경기장 근처에서 사는 친구집에 나를 포함한 축구부 인원 3명이 그 친구집에서 잔적이 있었다. 경기하는 날 이른 아침, 그 친구는 우리보다 더 일찍 일어나 손님대접 해준다며 계란후라이에 토스트를 정성껏 차려줬다. 잠이 많은 나는 언제나 맨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아이였고 헝클어진 머리에 반쯤 뜬 눈으로 터벅터벅 식탁 의자에 앉아 토스트를 한입 베어 먹었다.
"토스트가 엄청 딱딱하고 말랐네. 이거 토스트를 너무 태운 거 아냐? 아 근데 빵이 오래된 거 같은데?"
한입 베어 먹고 접시에 툭 던져버린 토스트처럼 나는 언듯 차갑고 모진 말을 툭 내뱉은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갔다. '토스트의 상태가 별로네. 빵이 오래되기도 했고 너무 많이 태웠어, 맛이 없으니까 안 먹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걸 행동으로 실행했다. 딱히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정말 부끄럽게도 나는 저 때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 이후로 몇 년 뒤 그때 당시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다른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고 그제야 토스트 사건을 듣게 되었다. 나의 저 뾰족한 말에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려준 친구는 상처를 받았다는 걸 한참 뒤 그것도 몇 년이 지난 후 알게 된 거였다. 당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즉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에 내 주위에 따뜻하고 성격이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는 건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가 싶다.
그 친구는 나보다 적어도 30분은 더 먼저 일어나 피곤했을 텐데도 본인을 포함한 4명이 먹을 양의 토스트를 정성스럽게 굽고 잼과 땅콩버터도 세팅을 해놓고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하려 했는데, 나는 단 3초 만에 그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정성을 샅샅이 뭉게 버렸다. 아침 차려준 거 고맙다고 90도 각도로 인사하고 빵조각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뒤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처리하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다 갖다 버리고 나왔어도 모자랄 판에 토스트가 탔네 뭐네 구시렁 됐다니... 다시 생각해도 무지했던 내 자신이 참 창피하다.
2)
미국에선 치대 입학식과 졸업식때 하는 선서가 있다. 그 선서에는 치과의사로서 지켜야 할 5가지 도리 (윤리강령, code of ethics)가 있다.
1. Patient Autonomy (환자의 자율성/권리를 존중할 것)
2. Nonmaleficience (환자를 해하지 말 것)
3. Beneficience (환자에게 이로움을 줄 것)
4. Justice (모든 환자들에게 공정할 것)
5. Veracity (진실만을 추구할 것)
Compassion 동정심 즉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할 줄 알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기본적인 도리는 저 치과의사의 윤리강령에 포함되지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이야 말로 저 위 다섯 가지 치과의사 도리의 가장 큰 발판 (foundation)이지 않을까 싶다. Compassion이 튼튼하게 장착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해 완벽한 교정 치료를 하고 환자의 치아가 완벽하게 가지런하고 좋은 교합을 이루어도 환자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고 의사를 향한 신뢰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완벽한 치료, 환자가 원했던 가지런한 치아와 줄리아 로버츠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완벽한 스마일을 얻었는 데 만족스럽지 않고 의사를 믿지 못한다고? 몇십 년 동안 공부한 지식과 스킬과 엄격한 매의 눈으로 치아 하나하나를 1도의 오차와 1mm의 오차를 계산하고 움직이며 피와 땀의 노력으로 1-2년을 거듭해서 삐뚤빼뚤했던 치아를 완벽하게 가지런하게 만들었는 데?
그렇다. 사회동물인 인간이 매일 겪는 흔하디 흔한 아주 원차적이고 간단한 이 사실을 나는 깨닫는 데 자그마치 5년이 걸렸다.
물론 당연하게도 환자들은 의사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교정의사에겐 그게 가지런한 치아와 치아의 완벽한 교합일 테고, 치과의사에겐 치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것이며, 외과의사에겐 수술이 잘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결과보다 더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바로 의사를 향한 환자의 믿음이다.
다른 직업군과 다르게 의사는 '의사'라는 타이틀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미 '의사'라는 이유로 환자들, 대중들은 그 의사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 어쨌든 의사니까 오랜 기간 공부했고 제대로 환자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진단할 줄 알고 그에 알맞은 처방/치료를 할 거라는 혹은 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극 소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혹시나 이 의사가 돌팔이이지 않을까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 보니 나같이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스킬과 동점심이 부족한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이 갖고 있는 이 신뢰성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하지 않는 다. 왜냐면 쉽게 얻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의사들은 환자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한다 (특히 나같이 부족한 의사들은 더더욱).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갑-을의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좋은 팀워크로 함께 문제(질환)를 풀어나가야 한다. 내가 교정의사며 치과의사이기에 가장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의사가 치아에 교정장치를 완벽하게 부착해 놔도 환자가 습관적으로 펜 끝부분을 씹어서 교정장치를 손상시키면 치아가 올바른 위치로 움직일 수가 없다. 아무리 스케일링을 열심히 하고 환자의 모든 치아에 빛이 나도록 치석과 플라그를 제거해도, 환자가 평상시 집에서 치아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치은염(gingivitis)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잇몸상태는 악화된다. 마찬가지로 심장질환 외과의사가 열심히 혈관에 스텐트 넣는 수술을 잘해도 환자가 변하지 않는 식습관과 운동부족 그리고 심지어 항응고제 (blood thinner) 약을 안 먹는다면 수술의 성공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 주위 몇 의사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I did my best. If patients don't listen and follow my recommendation then it's not my problem anymore, it's theirs". 환자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추천하는 걸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어.
과연 그럴까?
우리 의사들은 그렇다면 "말 안 듣는" 환자들을 내팽겨 쳐도 되는 건가? 만약 아니라면 그럼 우리 의사들은 어떻게 환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가?
3)
우선 의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의사의 정의는 "병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사람, 의술과 약으로 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영어 정의를 보면 "A physician, medical practitioner, medical doctor, or simply doctor, is a health professional who practices medicine, which is concerned with promoting, maintaining or restoring health through the study, diagnosis, prognosis and treatment of disease, injury, and other physical and mental impairments."
영어 정의가 의사라는 직업을 좀 더 알맞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promoting, maintaining, restoring health, 즉 건강을 널리 알리고, 유지하고, 복원하는 것도 포함이다.
질병 혹은 문제를 진단하고 거기에 알맞은 치료를 하는 건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의사라는 길을 선택해서 의사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학구적인 태도와 지능을 겸비하고 있다는 거고, 십여 년 동안 학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교육과 트레이닝을 통해 진단과 치료, 문제 해결 (problem solving)에 단련돼있다. 혹여나 기존에 겪지 못한, 알 수 없는 관문에 부딛였을땐 우리는 논문들을 찾고 읽으며 과연 이게 논리적인지, 가능한지, 사실적인지를 구분하고 판단할 줄 아는 critically analyzing skill이 장착돼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특히 치의학에서 많이 보이지만, 치료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는 hand-eye coordination (손과 눈의 동작을 일치시키는 능력)에도 특화되어있다. 의사 자격증을 딴지 몇 년이 지났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새로 나온 논문을 읽고 계속해서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동료의사들과 토론하며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의 분야를 넓혀간다.
방대한 지식과 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겸비되어있어도 왜 우린 환자와의 갈등을 피하지 못할 까?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환자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길래, 인공지능 (AI)가 해주는 진찰과 의학적 소견을 더 선호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는 것 인가?
4)
의사라는 직업에서 사실 가장 어려운 건 세상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바로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소통이다. 환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환자에게 치료 목적과 치료의 중요성 그리고 치료 후 조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즉, 우리 의사들이 의사라는 직업정신을 이행하기 위해선) 환자들과 소통을 잘할 줄 알아야 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땐 소통을 잘하기 위해선 청산유수의 말솜씨, 깊은 인내심, 타인의 니즈를 단번에 파악하는 센스가 겸비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타고난 지능, 기본적인 지식, 사교육 (높은 교육의 가르침)보다 집중력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부를 추척하고 부자가 되고 싶으면 높은 연봉보다 저축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환자와 소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의사의 태도,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동정심 (compassion)으로 비롯된 마음의 태도이다.
환자가 터무니없는 거를 요구하거나 말을 하더라도, 환자가 나에게 교정치료에 대한 불만이 아닌 충치치료에 대한 불만과 고통을 뿜어낼 때, 유지장치 (retainer)를 안 껴서 치아가 돌아간 거를 사랑니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이 아닌 말로 호소할 때, 환자에게 사실적인 팩트를 알려주기 위해 팩트를 짚고 넘어가는 게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이걸 아주 어려운 방법으로 깨달았다. 사랑니가 앞니의 치열에 영향을 안 끼친다는 논문까지 보여줬는데 순식간에 나와 환자는 서로 언성을 높이며 토론 아닌 토론으로 이어져 갔다. 결국 나는 그 환자의 신뢰를 잃게 됐다. 환자가 접수대에서 닥터킴 말고 다른 닥터를 원한다며 요구를 했다. 그 순간 나는 전혀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답답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런 저명한 저널에 나온 논문을 내가 알고 있고 또 환자에게 알려주는 데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 가?'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나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의사로서 환자가 갖고 있는 잘못된 정보는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그걸 하기 전에 내가 했어야 했던 건 바로 compassion을 갖고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갖고 환자의 불편함과 불만을 끝까지 들어주는 거였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고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아무리 좋은 치료를 한다하듯 환자들의 기억 속엔 그저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의사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을까?
5)
제일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가정의학과 전문의이다. 함께 있으면 철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이상한 드립에 유치하게 놀지만 우리의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누구보다 진지해지고 철학적인 질문과 생각을 공유한다. 내가 그 친구를 가장 우러러볼 때는 그 친구가 갖고 있는 의사의 사명감과 환자를 향한 이타적인 마음을 느낄 때다. 그 친구가 인턴 시절 경험했던 에피소드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
70살 할머니가 여러 차례의 넘어짐과 골절로 인해 심각한 염증이 있었다, 정확히는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알균 감염이었다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 MRSA). 염증은 끔찍할 정도로 심각했다. 너무 심각해서 수술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라운딩을 돌던 의사들이 항생제를 투여하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 환자는 완강히 거부했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그 할머니 환자는 전직 ICU (중환자실) 수간호사였었다. 항생제로 염증을 가라앉히기 시급한 상황이었고 또 의학계에서 오랜 세월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끝까지 거부하셨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보통 인턴들 같으면 안 그래도 힘들고 치이는 스케줄로 얼른 할 일 다 끝내고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는데, 내 친구는 해야 할 일들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전직 간호사 환자의 방으로 들어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항생제를 맞으셔야 한다, 안 그러면 염증이 더 심각해지고 더 안 좋게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이고 일방적인 환자를 향한 의사의 잔소리가 아니라 친구는 할머니에게 넌지시 말을 걸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느끼신 건지,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의 삶은 어떤지.
할머니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도 않고 그냥 다 포기하고 죽고 싶다고 하셨다. 골절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위해 남편이신 할아버지가 매일 오셔서 할머니를 챙기시는데, 그런 남편이 가엽기도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자기의 모습을 분명 남편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딸들에게도 이런 자기의 약한 모습을 딸들이 기억하는 자기의 마지막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친구는 할머니의 모든 말을 진심을 담아 다 듣고 공감해 주기 시작했다. 굳이 말을 안 해도 아마 할머니도 느끼셨을 것이다. 친구의 진심을. 친구의 진심 어린 눈빛과 경청하는 자세에서 보여주듯이 말이다. 친구는 천천히 그리고 젠틀하게 할머니에게 compassion을 기본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 할머니의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고 아플 것 같다고. 그런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 이해할 수 있다고.
친구가 여기서 할머니와의 대화를 끝냈다면 딱히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는 이 대화를 더 현명하게 풀어갔다. 할머니에게 말을 할 때 "you" 즉 당신이라는 말이 아닌 "I" 나였다면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내가 할머니의 딸이라면, 나는 나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이 항생제를 맞아서 이 염증을 용감하고 멋지게 치료해서 나아진 모습을 원할 것 같다고. 엄마가 포기한 모습이 내가 기억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라 생각하면 너무나 슬프고 괴로울 것 같다고. 친구의 이타적이고 진심 어린 마음은 할머니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할머니는 항생제 치료를 받으셨다.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건강을 되찾아 주고, 질병을 고치는 건 항상 거창한 수술이나 스킬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잠시나마 환자와 진심과 compassionate 한 대화로 우리 의사들은 환자를 구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정말 간단한 이치다. 사실 우리 인생에 많은 것들은 참 간단하다 오캄의 면도칼 (Occam's Razor)처럼. 이건 단지 의사-환자뿐만이 아니라, 부모-자식, 형제/자매/남매, 선생-학생, 배우자, 친구 등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장기연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평화롭고 아무 탈 없는 가족관계 (부모자식이든, 형제끼리든)를 잘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공통점이 있다.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이타적인 마음은 결국 타인을 향한 동정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6)
앞서 말했듯이 나는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꽤 적은 편이었다. 지금 30대의 나와 10대의 나는 꽤 많이 달라졌다. 서른몇 년의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미국과 한국 완전 상반대의 나라에 살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면서 많은 실행착오를 겪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듯이, 나도 자아성찰을 끊임없이 하며 나의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유전적으로 타고나길 이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드물게 있겠으나 인간은 매우 이기적이기 때문에 계속 노력해야 타인을 향한 compassion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우러러보는 인물 중 한 명인 찰리 멍거 (Charlie Munger)가 한 말 중에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 Learning is not memorizing, learning is changing your behavior. 다시 읽어도 정말 멋진 말이다. 마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게 다가 아니라 보고 난 후에, 읽고 난 후에 내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냐가 중요한 것처럼, 단순히 알고 인지하는 것에서 머무르는 게 아닌, 행동으로 옮겨 환자들과 좋은 소통으로 보다 더 나은 치료를 선사하고 환자들의 건강을 도와주는 의사가 돼야 한다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아까 앞서 말한 할머니 환자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현재 의사로 일하는 나의 고등학교 친구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의사로서의 고충을 풀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나 혼자만이 느끼는 게 아닌, 의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고 고뇌할 문제라는 거다. 이 세상에 (나의 친구처럼) 멋지고 열심히 사는 다양한 수많은 의사들이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굳건한 의사의 신념을 갖고 환자를 향한 이타적인 마음을 끊임없이 갈고닦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