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인가?
정신없는 오후를 보냈다. 교정치료 특성상 십 대 환자들이 많기에, 오전보다는 오후, 정확히 말하자면 방과 후의 진료시간은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치료를 하다 모든 진료가 끝난다.
퇴근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 때,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내가 유일한 낙인 나의 반려견 아인(아인슈타인의 줄인말)이가 나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과 얼른 집에 가서 나만의 자유시간을 갖고 싶은 간절함이 그 무엇보다 컸다.
얼른 집에 가고 싶은 설레는 마음으로 액셀을 밟았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퇴근길 꽉 막힌 차 도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 다시 밟았다 뗐다의 무한 반복. 자동차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 한곡이 끝날 때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퇴근길은 9마일 (5.5km 정도)의 거리인데 퇴근길 교통체증 (rush hour)을 감안하면 보통 20-25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40분이 지나서야 나는 꼬리를 1분에 60번은 족히 넘게 흔드는 아인이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평소에 나였더라면 꽉 막힌 도로 자체에 짜증이 확 나다가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러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화가 나다가 어차피 내가 지금 이 교통체증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쌓거나 혹은 이 시간을 짬 내서 한국에 있는 엄마와 아빠한테 전화해 평상시에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짧은 근황토크를 했었을 거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이 날만큼은 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근데 이 날 만큼은, 40분 동안 꽉 막힌 도로에 꼼짝 못 하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perhaps 나의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내가 평상시에 하는 행동과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9월 19일의 늦은 오후,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과 동시에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나의 머리를 가볍게 휘날렸다. 섭씨 20도. 바람의 풍량은 적당했다. 속력을 내지 않아도 바람은 선선히 불어왔다, 마치 오늘도 수고했다며 나를 어루만지듯이. 완벽한 기온은 지금 같을 때구나라는 생각으로 차의 모든 창문을 내렸다. 시원하며 깔끔한 이 바람이 나의 살에 닿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가을 특히 초가을은 참 멋진 계절이다.
집은 병원에서부터 동쪽으로 9마일 가야 하기 때문에 나의 백미러와 사이드미러에는 오렌지빛 태양이 비추고 있었고 내 앞에는 짙은 하늘색과 연보라색으로 섞인 하늘 아래 뉴욕 맨하탄 스카이라인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 앞에도 뒤에도 일어나고 있다니, 순간 색맹이 아니라 이 멋진 색깔의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팟캐스트를 듣지 않을 때면 평소에는 좋아하는 앨범 혹은 새로 나온 앨범을 트랙 1부터 순서대로 듣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만큼은 그냥 랜덤으로 내가 저장해 놓은 노래를 틀었다. 2001년도에 나온 CB Mass의 "Gentleman Quality" 노래가 오랜만에 나왔다. 22년 전 개코가 20살이었던 그때의 랩은 지금보단 다소 거칠지만 변함없는 플로우와 딕션 그리고 찰진 랩핑은 기가 막혔다. "ain't no time for hesitation~" 여자보컬의 코러스가 스피커에서 힘차게 흘러나왔다. 물론 이 노래는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이성의 구애에 관한 가사지만, 멋진 꿈을 꾸고 빛나는 미래를 설계 중인 나에겐 아직도 청춘이라며 파이팅을 외치는 코러스로 들려왔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 밟았다 뗐다 무한반복을 하고 도로는 꽉 막혀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 교통체증이 풀리지 않길 바라는 이상한 변태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갈 수 있다면, 이 바람을 더 느낄 수 있고 이 골든아워 (golden hour)를 더 보고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매우 행복하다는 걸. 기분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노을 아래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것뿐인데, 너무나 행복했다. 그래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던 것이었다. 우리의 삶엔 거창한 게 사실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고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 이렇게 우리가 가장 예상하지 못할 때 우리가 가장 바라고 필요한 행복을 선사해 주는 것 같다.
"The more you know, the less you need". 파타고니아 (Patagonia)의 설립자 이본 쉬나르 (Yvon Chouinard)가 한 말인데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명언 중 하나이다. 파타고니아 초창기는 의류가 아닌 클라이밍, 산악용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산악용품을 만들 때 심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한말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우리의 전반적인 삶에 인용할 수 있다 생각한다. 이상하게 인간은 간단한 것도 복잡하게 만드려고 하고 계속해서 더 갖고 싶어 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행복한 삶은, 행복한 일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힘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에서 그냥 창문을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작은 행복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서 허우적될때 우리를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되어주지 않을 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