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삶의 설계에 필요한 도구
0.
이 연재 시리즈의 첫 번째 글은 주체적인 삶의 선택에 대한 글이었고, 두 번째 글은 같은 주제에 빚대어 나의 개인적인 커리어 고민의 글이었다.
이번 세 번째 글은 주체적인 삶을 설계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대해 써보려 한다.
1.
주체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건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떤 산을 탈지는 정했는데, 막상 산을 타기 시작하니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산이라 길을 헤매고 외롭고 두려웠다. 그리고 나는 사실 겁이 많은 쫄보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최소한의 리스크와 최대치의 이득을 주는 길들을 택했던 거일지도 모른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최상의 옵션들을 테이블 위에 놓고 필요이상으로 분석한 뒤 최고의 선택을 하며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선택의 옵션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은 아무것도 써져있지 않은 빈 종이 었다.
막막했다. 나의 생각에 한계에 도달했고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럴 때 해결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경험치가 많은 인생 선배들 (부모, 어른들, 멘토들)에게 물어보는 거다. 그러나 가족 어른들이나 부모님의 의견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 대한 신빙성이 낮아서가 아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대한민국 탑을 찍고 대통령 표창장을 받을 정도로 사회에 큰 획을 그으신 대단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과 경험에서 나오는 제안이 진정 내 삶을 설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들이 해보지 않은 더 새롭고 넓은 관점을 원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특성상 보편적으로 어른들은 본인들의 신념과 주장을 아랫사람에게 심으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을 테지만).
태생이 독립적인 것도 한몫했다.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 혹은 부모님한테서도 나의 고민을 털어놓거나 의견을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학, 전공, 치대진학, 교정전문의, 배우자 등 인생에 큰 줄기의 선택들을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결정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결정을 내린 후 부모님께 통보를 했다. 누군가에겐 무례한 자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결국 나의 인생이니 내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생각했다. 내 인생이 잘못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생각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에 맞는 정보를 수집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나의 무의식 안테나를 길게 뻗었다. 더 열린 시각과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2.
그러던 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을 했다. 놀란 감독의 첫 데뷔작 <The Following, 팔로잉>의 블루레이부터 소장하고 있는 찐팬인 나는 어김없이 오펜하이머를 일주일 간격으로 2회 차 관람했다 (이 영화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는 일주일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동생이 놀란 감독에 대해 다룬 팟캐스트를 추천했다. <The Founders>라는 팟캐스트인데, 과거와 현재에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전기 및 자서전을 읽고 그가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채널이다. 어느덧 출퇴근길에, 러닝머신을 뛸 때 나는 항상 그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기억력에 매우 취약한 나는 팟캐스트의 각 에피소드를 들을 때마다 들은 날짜와,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나의 생각을 써서 기록을 남겼다. 3개월에 걸쳐 들은 총 58개의 에피소드를 노트에 정리했다. 마음 깊숙이 와닿는 이야기를 접할 땐 책을 직접 사서 읽었다. <The Founders> 팟캐스트로 인해 어렸을 때 유독 싫어했던 자서전이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다.
3.
팟캐스트의 시작으로 나는 멋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철학과 살아온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누구나 아는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일론 머스크, 윈스턴 처치힐, 워런 버핏뿐 아니라, 화장품 에스티 로더의 창시자 에스티 로더 (Estee Lauder), 다이슨 창시자 제임스 다이슨 (James Dyson), 비자카드 창시자 디 학 (Dee Hock), 래퍼 제이지 (Jay Z),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 (James Cameron)과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 뮤지션 밥 딜런 (Bob Dylan), 애플 수석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 (Jony Ive), 미국의 Southwest 항공사 창시자 어브 켈러 (Herb Keller), 워런 버핏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찰리 멍거 (Charlie Munger), 나이키 창시자 필 나이트 (Phil Knight) 등등 과거에 전혀 알지 못했거나 한 번쯤 이름만 들어봤거나 혹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의 깊은 서사를 알게 되었다.
자기 계발서와 달리 전기 및 자서전은 딱 그 인물 한 명을 깊게 탐구한다. 당시 시대적 환경과 배경이 자세히 나오고, 어떠한 선택들을 내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삶의 곡선 속 정점 및 심연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분야 속 다양한 인물들의 경험과 인생이 나의 지평선을 넓혀줬다. 그리고 그들의 스토리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상상 그 이상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나와 다른 시대에, 다른 대륙에서 살았던 혹은 현재 살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이 했던 인생의 고민들이 나의 고민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본성과 심리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더 이상 나는 길이 터지 않은 험한 산을 혼자 오르고 있지 않았다. 책의 인물들은 어느새 나의 든든한 동지이자 멘토가 되었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필요할 때 그들의 삶의 지혜를 꺼냈다.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는 100% 자유로워질 수는 없겠지만 책을 통해 만난 인물들로 나의 생각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생겼고 자신감이 더 붙었다. 글이란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 중 하나이다. 그들 중 정말 닮고 싶은 사람들은 롤모델로 삼았고, 10년 뒤에 나는 저 사람들과 닮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4년 1월 1일엔 새해다짐 대신 닮고 싶은 인물들의 특징들을 썼다.
4.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삶의 해답을 뚝딱 얻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삶의 해답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건 종교뿐이다.
오히려 반대로 답보다는 더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답이 아닌 어떠한 질문을 하느냐다. 그리고 그 질문들로 통해 알을 깨고 나오게 된다. 한 손에는 삶의 방향성을 묵묵히 뒷받침해 줄 나침반을 쥔 채로.
“One of the really tough things is figuring out what questions to ask. Once you figure out the question, then the answer is relatively easy” - Elon Musk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무슨 질문을 하느냐예요. 질문을 알면 답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 일론 머스크
나침반은 방향을 잡아준다. 내비게이션이나 지도가 아니다.
그 나침반이 무엇을 기반으로 방향을 잡을지는 개개인마다 다를 테다. 중요한 건 나 자신만의 나침반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예측불가능하고 불안한 삶에서, 새로운 걸 도전하려 할 때 사람들이 나에게 안된다는 이유를 퍼붓으며 나를 폄하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내 인생의 방향을 잡아줄 나침반.
어떻게 보면 운 좋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가 2023년 여름에 개봉했고, 운 좋게 취향이 비슷한 동생 덕분에 <The Founders>라는 팟캐스트를 알게 되었고, 운 좋게 그 팟캐스트 덕분에 닮고 싶은 멋진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자서전/전기를 읽는 걸 좋아하게 되었고, 운 좋게 그런 인상적인 책들로 인해 알을 깨고 나와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바뀌고 나침반을 얻은 거 일지도 모른다.
사실 운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안테나로 열린 마음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창조적인 생각의 신호를 받는 안테나와 같다. 수신기와 유난히 강한 안테나가 있고 좀 더 약한 안테나도 있다. 안테나가 예리하게 맞춰져 있지 않으면 신호가 소음에 파묻혀 놓치기 쉽다. 그 신호가 우리 감각 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정보보다 훨씬 더 미묘해서 그렇다. 피부로 느껴지기보다는 에너지에 가까워 의식적으로 입력되지 않고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 릭 루빈
"We are all antennae for creative thought. Some transmissions come on strong, others are more faint. If your antenna isn't sensitively tuned, you're likely to lose the data in the noise. Paritcularly since the signals coming through are often more subtle than the content we collect through sensory awareness. They are energetic more than tactile, intuitively perceived more than consciously recorded" - Rick Rubin
5.
탁자 위에 놓인 종이들은 더 이상 빈종이가 아닌 단어들, 문장들, 그림과 도형으로 빼곡히 차였다. 그리고 그 종이들은 더 이상 나 혼자서 쓰는 게 아닌 내가 같이 재밌게 일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써내려 나갔다. 나의 나침반은 어느덧 우리의 나침반이 되었고 우리는 함께 같은 곳을 향해 산속을 걸었다.
당연히 항상 낭만적이고 즐겁진 않았다. 다들 본업 퇴근 후 지칠 때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길도 없는 산속을 터벅터벅 겨우 걸으며 다투기도 했다. 본업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종종 어두컴컴한 산속을 헤매는 데에 메꿔졌다.
결국 우리 인간은 유해한 존재인고, 우리의 시간은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기에, 나의 결정에 대한 자기 회의가 들기도 했다. 나보다는 나의 팀원들의 시간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나를 믿고 함께 하는 그들의 시간을 허투루 쓰이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씩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먼 산꼭대기를 과연 우리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으로 물들기도 했다.
이러한 흔들림은 예상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나침반을 보았다.
"You have one life to live, so you might as well live a life as you would like to have. You should do something significant by your own denfition that is worth for you" - Richard Hamming
"여러분이 살아갈 인생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살아가고 싶은 인생을 사세요. 여러분 스스로가 정의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일을 하세요" - 리차드 해밍
다시 나침반을 꾹 잡고 일어선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매일 1%씩만 성장하자는 마음을 부둥켜안고 오늘도 어김없이 팀원들과 함께 전진한다.
https://youtu.be/73asqjYC8WY?si=oZS-RB-ZFjI9JK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