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를 뛰며 든 생각의 정리 2편
1.
운동을 매일 한지 어느덧 1년이 좀 넘었다. 초반에는 아침에 일어난 뒤, 반려견 산책을 시키고 난 뒤 운동을 하고 출근을 했었지만 반려견의 불리불안증으로 퇴근 후 곧바로 운동을 하는 걸로 루틴을 바꾸었다.
매일 30분씩 뛰고 30분씩 근력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 루틴의 큰 테두리는 확고하게 정하고 지키지만 그 안에서 하는 운동 종류 및 방법은 자유롭게 그날그날 땡기는 걸 하고 있다. 러닝을 하는 도중 오늘따라 오래 뛰고 싶은 날은 1시간 정도 뛰기도 하고 (10km), 근력을 오래 하고 싶을 때는 근력을 더 많이 하기도 하고, 날씨가 좋아 밖에서 뛰고 싶은 날에는 근력을 스킵하기도 한다.
재밌는 건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10km를 뛸 수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다. 매일 꾸준히 3-5km 정도 뛰었던 게 다였다. 10km를 처음 뛰게 된 건 사실 우연이였다.
어느 시원한 가을 아침, 눈뜨고 일어나니 문득 '오늘 10km를 뛰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해보지 뭐', 별생각 없이 덤덤하게 나의 무의식이 한 생각을 받아들이며 러닝화를 신고 집에서 나섰다.
5km를 뛰었을 무렵, '내가 10km를 뛸 수 있을까? 우선 1km만 더 뛰어보지 뭐'라는 생각에 몸을 맡겼다.
애플워치에는 6km가 마크되었다.
'저기 앞 큰 사거리까지 뛰고 멈추지 뭐'
7km. '날씨가 좋은데 조금만 더 뛸까?'
8km. '좀 힘들긴 한데 조금만 더 참고 뛰면 10km 금방 될 것 같은데?'
9km가 되었다. '근데 왜 달리기에는 5km, 10km, half marathon, full marathon으로 나뉘는 거지? 왜 그사이 7km, 12km는 없는 거지? 근데 10이라는 숫자가 좀 멋있긴 해'
그렇게 나는 나의 첫 10km 달리기를 완주했다.
2.
RPG게임을 좋아하는 나는 내 삶의 여러 분야를 게임처럼 플레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치대를 다닐 때 보던 시험들과 실습 시험들은 내가 깨야하는 퀘스트와 보스로 생각하며 공부했었고, 운전을 할 때는 내가 체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현재 하고 있는 창업은 마치 오픈월드 RPG게임을 하는 느낌이다. 바운더리가 없는 이 넓고 넓은 세계에서 나에게 활용되는 도구들과 나의 능력을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 결혼생활도 coop게임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 각자의 장점을 잘 활용하고, 서로의 약점을 상호보안하여 우리라는 팀이 더 성장하고 레벨 업하며 더 충만하고 보람찬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전략을 짜기도 한다.
운동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다. 처음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게임처럼 여러 장치를 만들어 놓고 마치 게임의 주인공처럼 하나씩 클리어하고 레벨업을 하며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짜릿함과 성취감을 느꼈었다.
근데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나니 나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달리기는 또 하나의 명상이라는 걸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3.
5km가 지나가는 시점이면 어느새 나의 하체는 기계처럼 계속 움직인다. 딱히 내 호흡에 집중도 하지 않게 된다. 그 순간부터는 물리적으로 나의 두 다리를 멈추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움직이고 달린다. 미친 듯이 계속 질주하며 지구를 돌고 도는 설국열차처럼. ‘아 좀 힘든데? 잠깐 멈출까?’라는 생각의 시그널을 보내는 신경세포 축색(axon)들은 두 동강이 난 듯 뇌에서 보내는 신호는 하체에 도달하지 않는 다.
어느새 나의 정신은 내 몸에서 이탈하여 정신과 시간의 방으로 들어간다.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이지 않는 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시각, 후각, 청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내 의식은 끝이 보이지 않은 새 푸른 바다라는 무의식에 이끌려 자유로이 헤엄친다. 그 어떠한 것도 성가시지 않다. 위험한 거친 파도나 비바람은 없다. 그저 햇살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나는 고요한 바다이다.
이 무의식의 바다는 사실 “나”이다. 우주탐험을 하는 우주비행사처럼 나의 의식은 “나”라는 바다를 항해한다. 일종의 자아탐험 (inner exploration)과 같다.
뛰는 동안 나의 자아에 계속해서 질문하고 답을 찾는 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가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 Socrates
"성찰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
운동할때 나오는 BDNF (Brain Derived Neurotropic Factor, 뇌유래신경영양인자) 때문인지 아니면 기분탓일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뛰면서 생각을 할때 정리가 더 잘되는 기분이다.
4.
달리기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망각의 힘이다. 뛸 때 오는 근육통, 거친 호흡, 신체적 힘듬으로부터 망각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의 두 다리는 기계가 된 듯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 망각의 힘은 나의 몸 이상으로 뻗어나간다.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느꼈던 스트레스,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들로부터도 망각된다. 내 두 다리가 움직이고 내가 뛰고 있는 이 순간만큼 나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뛰는 행동에서 느끼는 건 오로지 한 가지이다. 내가 살아있어서. 살아서 움직일 수 있어서. 뒤가 아닌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갈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강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이어간다. 달리기는 100% 나의 의지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멈추지 않는 이상, 내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움직이고 뛴다.
나는 이것을 해낼 거라 믿었고, 현재 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달리기를 완주하는 순간, 나는 나의 강한 의지로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끼고 증명하게 된다.
5.
이러한 자아확신 및 믿음은 내 일상생활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더 도전하고 싶고, 이루어 낼 거라는 확신이 강해진다. 위대한 러너가 되기위해 세계 최상의 레이스 보스턴 마라톤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위대한 일을 하려면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상상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다면 그건 망상에 불과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이유 및 의지, 실행력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꺾이지 않는 의지, 미친 실행력, 탁월한 능력이 있더라도 최상의 컨디션(신체적 및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는 다면 무용지물이다. 누구나 단기간에 바싹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서 최고의 결과물을 혹은 최고의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 마치 벼락치기로 시험에서 만점을 몇 번은 받을 수는 있겠으나 벼락치기를 매일 4년 동안 할 수도 없거니와 혹여나 그렇게 하더라도 결괏값이 절대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단기간이 아닌, 장거리 레이스다. 오랫동안 꾸준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성장하고 싶다. 200%로 3년가는 게 아니라 80%로 30년을 가고 싶다. 피터 티엘(Peter Thiel)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속가능을 위해 우리는 내일을 위해 남겨야 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 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게 바로 꾸준한 운동이라 생각한다. 달리기는 모두를 위한 운동은 아니니 억지로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떠한 운동이든 간에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한다. 기동성과 자율성이 있는 동물로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매일 하는 달리기와 근력운동으로 체력이 좋아지고 몸이 좋아진 것보다 오히려 정신력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곳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징검다리처럼.
나는 어릴 때부터 지는 건 싫어했지만,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은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없다. 모순적인 문장일 수도 있겠으나,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타인과의 경쟁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러닝 혹은 사이클링 중에 다른 누군가가 나를 제쳐도 딱히 큰 자극은 없다. 나의 관심사는 나 자신뿐이다. 작년에 나, 한 달 전의 나, 어제의 나와 경쟁하고 더 나아지고 싶을 뿐이다. 과거의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
단연 러닝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나 자신과의 싸움에 가장 적합한 스포츠이다. 필요한거라고는 두 다리와 신발뿐이니까.
6.
어느새 애플워치의 진동으로 나의 의식은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나온다. 드디어 내 두 다리에게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고 강하게 신호를 보낸다. ‘언제 10km를 뛰지’에서 ‘벌써 10km를 뛰었다니!’로 온 기특한 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하기 위해 집 앞 건너편에 있는 쉐이크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0km를 완주하고 베어 먹는 쉑버거의 첫 한입보다 더 황홀한 게 이 세상에 존재할까? 오늘따라 쉑버거의 고기패티가 숯불에 구운 꽃등심보다 더 향긋하고 감칠맛 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