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러시아의 심장, 크렘린

첫 번째 퇴사여행 in Moscow - 여백을 용납치 않는 화려함

by 누비

긴 비행에 지쳐 기절하듯 숙면을 취하고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시차로 인한 노곤함 한가득 끌어안으며 퇴사자로서의 여유를 만끽했다. 공식적으로는 이전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느 곳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의 몸. 취준생 시절에는 이 한 몸 다 바쳐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될 테니 부디 어딘가에 소속되게만 해달라는 간절함만 가득했다. 막상 회사원이 되니 매일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만 차올랐다.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욕망은 적나라해서 우습지만, 진심을 외면하고 아등바등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더라. 쉼표와 환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고, 나의 탈출구는 여행이었다.


ⓒ누비, 무명용사의 묘(Могила Неизвестного Солдата)



이번 여행의 정식적인 첫 일정은 크렘린(Московский Кремль). 크렘린의 무기고와 상뜨의 예카테리나 궁전은 반드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던지라, 티켓 오픈 시간을 확인해가며 인터넷으로 미리 구매를 했다. 사전 예약 증빙을 가지고 현장에서 다시 발권을 해야 하긴 하지만, 전용 매표소는 별도의 창구로 운영되고 줄이 짧다. 여유롭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예측 불가한 것. 당연스레 혼자 하는 여행을 기획했는데, 비슷한 타이밍에 이직이 결정된 친구 덕분에 동행이 생겼다. 친구가 급작스러운 여행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나와 함께 떠나지 않는다면 평생 러시아 땅을 밟을 일이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고. 비행편이 다르고 숙소도 따로 써야 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전예약이 마감된 무기고 티켓 한 장을 더 구매하기 위해 크렘린 입장 대기시간이 약간 늘어났을 뿐. 매표소 오픈이 9시였고 8시 반부터 줄을 섰다. 티켓 구매를 완료한 시점은 9시 40분 정도. 7월 말 성수기임을 감안했을 때 그리 긴 기다림은 아니었다.



크렘린의 무기고(Оружейная палата) 티켓 구매가 쉽지 않은 이유는 입장시간과 입장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티켓의 입장시간보다 늦으면 입장이 불가하다. 사전 예매한 10시 입장 티켓은 벌써 마감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친구와 따로 관람을 하기로 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빡빡한 건가, 하는 투덜거림도 잠시. 작은 문턱을 넘고 코트 보관소를 지나 레드카펫이 깔린 중앙계단이 좌우로 나눠지며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모습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럽에 다시 왔구나. 조용한 공간에 차곡차곡 걸음을 내딛으며 한껏 부풀기 시작한 기대감 터져버리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시간. 부풀어 오른 기대를 오롯이 충족시키는 온갖 전시품들이 모든 순간을 짜릿함으로 채워내며 극렬한 행복을 선사했다.



무기고에는 무기 대신 종교화, 성경, 시계나 촛대 등의 물건들이 한아름 전시되어 있다. 금빛이 번쩍거리고 각양각색의 보석이 자태를 뽐내는 이 전시관은, armoury chamber 라는 명칭보다 treasury chamber 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만일 드로잉에 소질이 있거나 디자인에 재능이 있었더라면,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전시품 하나하나를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 하루를 고스란히 이곳에 바쳤으리라. 구석구석 디테일이 살아있고 요소요소 독특함이 넘실댄다. 예상치 못한 재기발랄함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르고, 화려함을 넘어선 휘황찬란함에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이후 많은 궁전과 여러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무기고 이상의 아름다운 전시품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차피 사진으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촬영이 아예 불가하다는 점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카메라 대신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단상을 짧게 기록했는데, 부족한 묘사와 빈약한 상상이 당시의 감상을 생생하게 끌어내지 못하여 안타깝다. 모스크바에 재방문하기 전 반드시 크로키나 드로잉을 배우리라.



전반적인 감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배운 변태 같았다. 세밀하고 섬세한 디테일은 강박에 가깝고, 호화롭고 휘황한 장식은 과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 치의 여백도 용납하지 않고 꽉꽉 채워 넣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는 듯, 모든 부분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하나의 전시품 안에 다양한 소재가 혼재되어 있어서 신선했고, 그 소재들이 기상천외하게 엮여있어서 경탄스러웠다. 컵의 손잡이는 용이 뒤틀린 모습이고, 주전자의 입구는 여성이 껴안고 있는 형태다. 지구를 이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촛대를 이고 있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촛대 중심에 등을 대고 선 남성들이 쥐고 있는 고삐에 걸린 산양들이 바깥쪽 촛대를 향해 뛰어들듯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기도 하다. 배 위에 선 남성이 배를 이고 있고, 그 배는 돛을 연결하는 밧줄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바닥의 나무 그루터기에서 시작되어 조개껍데기로 이어지고 천사와 여성, 다시 천사로 이어지며 화려함을 뽐내던 조각의 최상점은 작은 받침대다. 기능보다 외관에 충실한 비효율성이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을 한층 부각시킨다.



이스터에그 위에 꽂힌 릴리 한 다발의 하얀 보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정교하게 조각된 바위섬 곳곳의 탑과 동물들은 놀랍도록 사랑스러웠다. 유난히 두터운 표지와 아낌없는 금박은 당시 책이 얼마나 귀했는가를 여실히 증명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함께 그린 작품이 유난히 많았는데, '성스러운' 후광과 '강력하고 높은 지위를 상징하는' 왕관을 금박의 양각으로써 입체적으로 표현한 점이 흥미로웠다. 온갖 디테일을 넣어 금으로 치장한 덕분에 성스럽다기보다는 세속적으로 보인다는 아이러니가 즐거웠다. 성경 속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을 마치 그림책처럼 엮어내는 것이 러시아 종교 예술의 특색이어서, 마치 만화책을 읽듯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균형 잡힌 잘생긴 얼굴의 예수보다는 특이하고 개성 넘치는 외양의 예수가 훨씬 많은 것도 유쾌했다.



ⓒ누비, 유럽의 구름



나중에 들어보니 친구는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했더라. 제작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어떠한 디테일이 숨어있는지 등등, 주된 전시품들의 이야기를 설명해줘서 관람에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었다면 상세한 뒷이야기를 알 수 있었겠지만, 작고 중요치 않은 작품들은 휘리릭 지나쳤을 확률이 높다. 씹어보고 곱씹을수록 볼거리가 더 많은 전시관이었기 때문에, 오디오 가이드 없는 관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취향 차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무기고를 나서니 환하고 맑은 유럽의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수채화 같은 구름을 마주하니 새삼 유럽 대륙에 서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누비, Соборная площадь
ⓒ누비, 성모영보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
ⓒ누비, 이반대제의 종탑(Колокольня Ивана Великого)



무기고를 등지고 왼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성당으로 둘러싸인 광장이 나온다. 사방이 관광객들로 가득하여 시끄럽지만, 금빛과 흰색으로 채워진 거대한 건축물들이 탁 트인 광장을 꽉 채우며 안정감과 고양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벽면과 천장까지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화려한 성당 내부는 웅장함과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타 유럽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이 새로웠다.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는 러시아인의 삶에 녹아있는데, 이미 관광지가 되어 버린 크렘린에서는 그 일상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 치여가며 성당 내부의 작품들을 구경하는 대신, 광장에 서서 성당 외부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역사를 가늠해보는 행복을 누렸다.



ⓒ누비, Соборная площадь 파노라마
ⓒ누비, 크렘린 성당 팜플렛



성당마다 팜플렛이 있는데, 한국어도 있어서 반가웠다. 성당들을 꽤 상세하게 설명해둔 덕분에 관람에 도움이 됐다. 이후 상뜨에서는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종종 만날 수 있어서 한층 반가웠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반나절 이상 머물면서 이곳저곳 더 꼼꼼하게 봤을 텐데, 아무래도 여행 첫날이다 보니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별을 하고 말았다. 크렘린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 것도 유의미했을 텐데, 매일매일 너무 많이 걸어 다니는 바람에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여러모로 크렘린을 다시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잔뜩 만들고 온 여행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하루를 고스란히 투자하여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기억해야지.




모스크바 2일 차 ①

크렘린 무기고는 사전 예매 필수!

크렘린 성당들도 함께 사전 예매해두면 편리함 (The Architectural Complex of the Cathedral Square), 예매 페이지

사전 예매 대상 매표소가 별도로 있으니 줄을 잘 서야 함, 예약 증빙 및 여권(신분증)이 필요함

크렘린 오디오 가이드는 매표소 맞은편의 사무실에서 대여 가능함

박물관/미술관 입구의 코트 보관소에서 큰 짐과 무거운 외투는 반드시 맡겨야 함, 배낭을 메거나 패딩을 입은 채로 입장하려고 할 경우 검표원의 제지를 받을 수 있음 (짐보관은 보통 무료)

크렘린 내부에는 음식을 파는 곳이 없으므로 배를 미리 채워두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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