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꿈꿔왔던 첫 만남, 모스크바

첫 번째 퇴사여행 in Moscow - 붉은광장의 야경

by 누비

때는 현실에 발이 묶여있던 고등학생 시절. 생경하고 난해한 키릴 문자를 배우고 발음하는 것은 썩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 언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단어의 성별을 구분하고 어미를 바꾸며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시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역사와 문화를 마주하는 것이 훨씬 쉽고 즐거웠다. 더듬더듬 혀를 굴려 어설픈 발음을 반복하는 것보다, 유려하게 말을 쏟아내는 영화 속 인물 너머 새하얀 설경과 생소한 건물을 구경하는 것이 보다 짜릿했다. 잘 알지 못하기에 막연한 동경은 점차 커졌고, 익숙지 않기에 덧칠한 상상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부푼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어른이 되면 꼭 가보리라 다짐을 거듭하며 꿈을 꾸었다. 드넓은 러시아 영토를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크렘린을 방문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궁전들을 두 눈 가득 담아낼 꿈을.



어른이 되었으나 인생은 호락호락 기회를 내어주지 않았고, 학창 시절의 소박한 꿈은 숙원이 되어 가슴 한켠에 고요히 침잠했다. 언젠가는 가겠지. 급하지 않아서 미뤘고, 여유가 나지 않아서 놓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녹아들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동안 작은 소원은 잊히고 멀어졌다. 그러다 문득 당연한 깨달음을 마주했다. 시간과 돈이 동시에 충족되는 순간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력직 합격으로 목표했던 퇴사가 가능해지자마자 가장 먼저 퇴사일과 입사일을 정했다. 바쁜 시즌이었기에 퇴사하는 날까지 일을 해야 했지만, 귀국일 다음다음날 첫 출근을 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



DSCF2633.JPG ⓒ누비, 부활의 문 / 역사박물관



도착하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가장 먼저 이 광경을 마주한 찰나를 기억한다. 의외로 희열이나 경탄과 같은 날카로운 감정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바라고 상상해온 첫 만남은 현실감이 떨어져서 오히려 덤덤했다. 벅찬 감동으로 일렁이는 대신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을 끌어안은 채 두 눈 가득 공간을 담았다. 눈길도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서 온몸으로 도시를 맞닥뜨렸다.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들을 휘감고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이 도시를.



DSCF2636.JPG ⓒ누비, 부활의 문



부활의 문을 지나 탁 트인 공간. 수많은 역사가 아로새겨진 러시아의 심장. 크렘린(Московский Кремль)과 레닌 묘(Мавзолей В. И. Ленина)와 성 바실리 대성당(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ного)과 역사박물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과 굼 백화점(ГУМ)으로 둘러싸인, 붉은 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사진으로 보고 영상으로 만났던, 언젠가는 이렇게 직접 두 발로 딛고 서리라 다짐하고 꿈꿔왔던 곳.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깨달음이 스며들었다. 드디어, 여기에, 있다.



DSCF2651.JPG ⓒ누비, 붉은 광장에서 바라본 크렘린
DSCF2683.JPG ⓒ누비, 크렘린의 높은 벽과 레닌 묘
DSCF2671.JPG ⓒ누비, 성 바실리 대성당
DSCF3241.JPG ⓒ누비, 굼 백화점 외관



모스크바에 머문 나흘 동안 이 광장을 여러 차례 찾았다. 담백했던 첫 만남과는 다르게, 방문을 거듭할수록 붉은 광장은 더욱 각별해졌다.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성 바실리 대성당은 끝없이 시선을 잡아챘고, 화려한 자본의 존재감 속에서도 광장의 정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굼 백화점은 안정감 있었다. 딱딱하고 날 선 레닌 묘의 아우라는 러시아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냈고, 붉은 벽돌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인 듯한 색감의 역사박물관은 귀엽고 정겨웠다. 무엇보다 '붉다'는 의미와 동시에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닌 Красная 한 광장의 존재 자체가 압도적으로 경이로웠다. 유럽의 광장들이 공유하는 고유한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닌 공간. 스쳐 지나간 과거와 누적된 이야기 위로 현재의 기억과 시간이 쌓이고 포개지는 장소. 바로 이곳에 나 역시 실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이 여행은 완벽한 가치를 찾았다.



모스크바의 첫날은 닥터 지바고 카페에서 늦은 저녁식사로 마무리했다. 차근차근 기억을 곱씹고 기록하다 보면 당시의 행복이 몽글몽글 되살아나겠지. 배움보다는 비움으로 알차게 채워냈던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모스크바 1일 차

날씨: 러시아의 7월 말은 한국의 초가을, 반바지 불가함, 얇은 여름 카디건 비추

아에로 익스프레스: 기차, 30분 간격, 역사 내부 진입로 옆 무인기에서 티켓 발권 가능

얀덱스: 러시아 택시 어플, 우버와 비슷, 빠르고 싸고 안전함, 차종과 차의 상태는 천차만별

숙소: 찾기 어려운 입구, 엘리베이터 없는 4층에 위치, 직원이 영어를 못하지만 친절함, 붉은 광장 및 볼쇼이 극장과 가까움

굼 백화점: 아이스크림이 트레이드마크

닥터지바고 카페: 24시간 운영, 본격적인 레스토랑으로 분위기 훌륭하고 맛도 좋음, 영어 메뉴판 있음, 솔린카(soup) 추천, 공식 홈페이지

1일 차 경비 약 2,000 루블 : 아에로익스프레스 (500루블) + 유심 (500루블) + 식사 (1,000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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