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종교, 일상에 묻어나다

첫 번째 퇴사여행 in Moscow - 바라볼수록 담백하고 차분한 도시

by 누비

크렘린을 벗어나 친구와 재회한 뒤 다소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다는 아르바트 거리로 향할까 했지만, 번화가가 썩 내키지 않아서 메트로 한 정거장 거리인 그리스도 대성당 근처에 가기로 했다. 막상 나와보니 식당이 마땅치 않아서 대성당 뒤쪽 모스크바 강의 다리(Патриарший мост)를 건넜다.



20190730_060.jpg ⓒ누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Храм Христа Спасителя)
20190730_040.JPG ⓒ누비, 모스크바 강



한강보다 넓은 강은 만나본 적이 없기에 강을 건너는 행위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이 공사 중인 탓에 길가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서 초조했다. 구글링으로 찾은 맛집(Strelka)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다리를 하나 더 건넌 후에야 아래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한참을 헤맨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맛집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지도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장
ⓒ누비, The Waiters Restaurant
ⓒ누비, The Waiters Restaurant



기꺼이 구글 지도까지 첨부할 정도로 깔끔하고 맛있는 식당 The Waiters Restaurant 이다. 우연한 만남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묘미임을 실감하며, 달콤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여유롭고 호화로운 만찬을 즐겼다. 브루스게타 Bruschetta와 Beef Stroganoff with Baked Mashed Potatoes, 크림 파스타, 로투스 맛의 Honey Cake까지 알차게 먹었다. 러시아에서는 빈 접시가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것이 예의가 아닌지, 음식을 거의 다 비웠다 싶으면 직원이 바로 다가와서 치워주느냐 묻더라. 닥터후 시즌3의 우는 천사 에피소드에 나온 배우 캐리 멀리건을 닮은 직원이 너무나 친절해서 평균보다 더 많은 팁을 두고 나오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식당 하나를 추천하라면 반드시 이 식당을 선택하겠다.



20190730_046.JPG ⓒ누비, 노보데비치 외벽
20190730_050.JPG ⓒ누비, 노보데비치 수녀원 (Успенская церковь)



배를 든든히 채우고 얀덱스 택시를 불러 노보데비치 수녀원(Новодевичий Монастырь)으로 향했다. 안톤 체호프 등 유명인들이 잠들어있는 노보데비치 묘지도 방문해보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 수녀원의 곳곳에 일상적인 허름함이 묻어있다. 관광객보다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더 많은 예배공간은 촬영 금지다. 종교화 앞에 서서 성호를 긋고 예수의 발에 키스를 하고 그 위에 이마를 맞댄 다음 잠시 기도를 올린다. 그리스 정교 특유의 이 기도 때문에 어느 성당이건 관리인이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액자의 유리를 닦아내곤 했다. 양초의 철심이 타닥, 하고 타들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만히 울린다.



20190730_052.JPG ⓒ누비, 일명 백조의 호수 (Большой Новодевичий пруд)



차이코프스키가 백조의 호수를 작곡했다는 바로 그 호수. 두터운 구름이 쉴 새 없이 흐르며 변화무쌍한 하늘을 만들어내는 걸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위대한 작곡가가 이 조용한 풍경을 사랑한 이유를 알 것만도 같다. 산책로 옆에는 지난 방러 당시 문프가 방문한 레스토랑 우피로스마니(У Пиросмани)가 있는데, 아쉽게도 식사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뚜벅이를 선호하는 여행스타일이건만, 동행이 있고 택시비가 저렴하니 굳이 택시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외관상 전혀 택시로 보이지 않는 차량을 몇 번 만났으나, 어플에 차량번호 등이 명기되는 등록제를 믿고 GPS를 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매번 잘 이용했다.



20190730_039.JPG ⓒ누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Храм Христа Спасителя)
20190730_072.JPG ⓒ누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외관



새하얀 외벽과 황금색 돔 지붕 덕분에 모스크바 어디든 눈에 띄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다채로운 종교화가 가득한 성당의 내부와 지하는 무료입장이나 촬영이 불가하고, 주변 정경을 볼 수 있는 발코니는 유료지만 멋진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 성당의 4면을 전부 보기 위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으나,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20190730_081.JPG ⓒ누비, 표트르 대제 기념비 (Памятник Петру I)
20190730_090.jpg ⓒ누비, 그리스도 대성당 발코니 파노라마



높은 건물이 적은 유럽의 도시에 방문하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반드시 방문한다. 도시 정경을 한눈에 담아내는 고양감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빼곡히 들어찬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흔하지 않은 오래된 도시들은, 건물이 저마다 담고 있는 특색과 역사를 가늠해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양껏 사진을 찍은 뒤, 바로 옆에 위치한 푸쉬킨 미술관으로 향했다. 두 개의 건물 중 대성당과 가까운 쪽에서 복합권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매표소 줄이 무척 길었다. 입구의 친절한 직원이 Korean 이냐며 너희가 사용하는 언어로 알아챘다는 제스처까지 취해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인상주의 전시는 유럽 여타 도시에서 질릴 만큼 만났기에, 친구도 나도 미련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했다.



DSCF2820.JPG ⓒ누비, 모스크바 시티 뮤지엄 전시품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피곤에 절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얀덱스 택시에 또다시 탑승했다. 56층의 전망대에서 모스크바의 야경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VR 체험도 있는 듯하나,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에 전망대 비용만 지불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야경 또한 여행 일정에서 절대 빠뜨리지 않는 루틴이다. 새카만 어둠을 밝히는 불빛 하나하나가 도시를 구성하는 사람 하나하나와 다름없다.



DSCF2823.JPG ⓒ누비, 모스크바 시티 뮤지엄 (Музей-Смотровая Москва-Сити) 야경



높은 건물이 거의 없는 모스크바는 불빛 자체가 많지 않은 도시이기에 야경이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밤을 잊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담백하고 적막한 이 도시의 밤이 새삼 다정하고 기꺼웠다.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길을 밝히고 있는 빛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비로소 이 도시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2일 차 ②

모스크바 7월말은 트렌치코트 어울리는 날씨

그리스도 대성당 발코니 꼭 올라가 볼 것!

대성당 내부로 입장하여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야 더 다양한 성화들을 만날 수 있음

그리스도 대성당 외부 화장실 요금이 저렴함

모스크바 야경을 볼 수 있을 만한 곳은 모스크바 시티 뮤지엄이 유일하나, 야경에 흥미가 없다면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됨

얀덱스 택시가 택시 같지 않더라도 괜찮음

러시아 레스토랑 방문 시, 에피타이저/메인 디쉬/음료/디저트 풀코스 주문 (1인 기준)

팁은 10% 수준으로 생각하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 동전털이 하고 나옴

2일 차 경비 약 6,500 루블 : 크렘린 (700루블) + 무기고 (1,000루블) + 노보데비치 (100루블) + 대성당 발코니 (400루블) + 모스크바 시티 뮤지엄 전망대 (690루블) + 식사 (2,900루블) + 택시 및 지하철 (700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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