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화려하되 고요한, 황제의 별장

첫 번째 퇴사여행 in Moscow - 모스크바 시내를 벗어나

by 누비

해외여행을 시작할 때면 항상 지도부터 폈다. 십 년 전에는 잘 정리된 여행책의 지도를, 수년 전에는 깔끔하게 그려진 인터넷의 관광지도를, 그리고 근래에는 구글맵을. 가보고 싶은 곳을 지도에 잔뜩 체크한 뒤, 그 점들을 효율적으로 이어가며 동선을 짠다. 이번 여행 또한 구글맵에 한가득 북마크를 저장한 뒤 일정을 짜기 시작했고, 모스크바 시내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들을 하루에 몰아서 가보기로 결정했다.



모스크바 여행 3일차 방문지



요거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얀덱스를 불렀다. 메트로를 이용할 경우 환승 없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예정된 동선이 긴 날이기에 최대한 덜 걷는 교통수단을 택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쌀쌀한 날씨의 평일 오전 10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출근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유의 신분을 행복하게 만끽하면서 차창 너머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눈에 담았다. 이내 한적을 넘어 적막하기까지 한 거대한 콜로멘스코예 입구에 도착했다. 열려 있는 가게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와 빵을 산 뒤, 공원 지도를 확인하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원래 현지투어를 찾아볼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누비, 콜로멘스코예 지도, 공원 우측 상단의 입구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누비, 카잔성모교회



걷다 보니 금세 독특하고 귀여운 돔을 가진 건물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카잔 정복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은 카잔성모교회다. 내부는 역시 경건하고 고요했다. 유리 케이스 안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림 하단에 좌우를 잇는 줄이 있고, 보석이 박힌 오래된 금반지들을 그 줄에 한가득 걸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십일조로 낸 물건에 담긴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성화와 함께 모아둔 것일까. 그리스 정교 여성 신자들은 기도할 때 스카프를 머리에 꼭 쓰는데, 그래서인지 성경과 묵주 등을 파는 실내 가판대에서 스카프도 팔고 있었다. 덕분에 추위에 떨던 친구가 여기서 스카프를 구매하여 여행 내내 잘 사용했다.



교회에서 나와 쭉 걷다 보면 민트색 지붕 아래 커다란 아치문을 만나게 된다. 상단에 성인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요새 같은 성문을 지나는 순간, 키 큰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시야가 탁 트인다. 새하얀 회벽의 건물과 그 너머의 강, 그보다 좀 더 멀리 있는 모스크바 시내까지. 예상치 못한 풍경은 일순 말을 잊게 하는 힘을 지녔다. 수년 전 슬로베니아 블래드 호수 근처에서 느껴봤던 고양감이 온몸을 휘감으며 짜릿함을 선사했다.



ⓒ누비, 예수승천교회 정면
ⓒ누비, 예수승천교회 측면



날이 궂고 단렌즈의 화각이 좁아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탁 트인 언덕의 새하얀 교회가 날카롭고 단정한 자태로 보는 이들을 휘어잡는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첨탑과 지붕들이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승천을 가능케 할 법한 상승감을 자아낸다. 푸르른 언덕과 잔잔히 흐르는 강, 이 고요한 자연 속에 화려하지만 단아하고 담백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건축물이 부드럽게 녹아든다. 복닥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채 경건하게 침잠하는 공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정적이다.



ⓒ누비, 예수승천교회
ⓒ누비, 예수승천교회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하여 정면의 계단을 올랐다. 러시아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차용했다는 이 건물은 발코니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직각으로 이어지는 지그재그 형태도, 위에 얹은 나무 지붕도, 외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동선도 전부 독특했다.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처럼, 강변의 높은 탑에서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쾌적함은 이내 해방감으로 이어졌다. 내벽 가득 종교화가 걸린 러시아의 여타 교회와 다르게, 예수승천교회의 예배당은 그림 없이 담백하고 정갈했다. 첨탑 끝까지 뚫려있는 높은 층고가 외풍 소리에 강한 울림을 더했다.



이곳은 크렘린과 노보데비치 수녀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별도로 마련된 전시관에서 여러 흥미로운 정보를 얻었다. 두터운 사면의 벽 중 두 개의 면에 약간의 경사를 지고 사선으로 빗겨 난 깊은 창문이 나있는데, 이것의 용도에 대해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것이 특히 재미있었다.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담긴 두터운 책도 전시되어 있는데, 지붕의 꽈배기 모양 무늬에 대한 수학적 계산이나 여러 가지 도면들이 시선을 끌었다. 건축학도를 꿈꾸던 어릴 적 호기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만큼.



ⓒ누비,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본 예수승천교회
ⓒ누비, 모스크바 강
ⓒ누비, 콜로멘스코예 공원



예수승천교회 이외의 건물은 들어가 보지 않았다. 강변의 매대에서 따뜻한 음료 하나를 샀는데, 한참을 마시고 나서야 뱅쇼였음을 깨달았다. 강을 따라 걷는 대신, 내려온 길과 강가 사이의 오솔길을 올라가서 평지를 만났다. 지나치는 문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한적한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오른편으로 매실처럼 생긴 과일이 잔뜩 매달린 과수원 밭이 펼쳐졌다. 친구도 나도 걷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짧지 않은 거리가 그리 힘겹지 않았다.



ⓒ누비, 콜로멘스코예 목조 궁전 (Дворец царя Алексея)
ⓒ누비, 콜로멘스코예 목조 궁전



목적했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경탄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성 마르카 교회의 모자이크 지붕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지붕이 나무에 색을 칠한 것임을 알아채고 더욱 놀랐다. 중국 같기도, 아랍 같기도, 인도 같기도, 아예 동화 속 장난감 궁전 같기도 한 이 건물이 지독히 매력적이었다.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여름 궁전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회가 된다면 익숙한 카메라를 들고 꼭 한 번 다시 방문해보고 싶을 만큼 곳곳이 새롭고 신선했다.



ⓒ누비, 목조 궁전 내 레스토랑 식사
ⓒ누비, 목조 궁전 내 레스토랑 화장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궁전 입구 왼편의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아찔하게 현란한 메인룸이 반겼고, 안쪽으로는 새하얀 방이 왼쪽으로는 새빨간 방이 벽지와 조명을 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끔찍한 혼종은 대륙의 감성과 유사해서 멀미가 날 정도였는데, 식사 직후 궁전을 방문한 후에야 인테리어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궁전의 방들에서 컨셉을 그대로 가져왔던 것이다! 목조 궁전은 외관만 독특한 게 아니라 내부 또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레스토랑은 직원이 친절하고 스프가 특히 맛있었다. 화장실의 문마저 평범하지 않아서 마치 놀이동산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만족스러운 재충전의 시간을 마치고 외부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한 뒤 입장했다. 구비된 비닐로 신발을 감싸고 정해진 루트대로 관람을 해야 한다. 루트에서 벗어난 방에 들어서면 바로 안내원의 제지가 들어온다. 방마다 한쪽 모퉁이에 놓여있는 굴뚝의 타일 모양이 전부 다른 것이 놀라웠다. 접견실, 드레스룸, 스터디룸 등 용도가 확실했고, 방마다 주인의 취향이 혼미할 정도로 가득했다. 언어로는 묘사와 표현이 불가한 온갖 것들의 향연에 종국에는 어지러웠는데, 내부 촬영이 불가하여 아쉬웠다. 사우나를 연상시키는 목욕방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벽면의 아궁이에서 데운 물을 옮기는 욕탕과 그 옆의 계단식 좌석이 무척 익숙해서 웃음이 났다.



ⓒ누비, 목조 궁전
ⓒ누비, 목조 궁전 지붕
ⓒ누비, 목조 궁전 지붕



궁전 내부 기념품샵에서 오디오 가이드도 빌릴 수 있고 탑 위로 올라가는 티켓도 구매할 수 있다. 독특한 지붕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기꺼이 50루블을 더 내고 탁 트인 발코니로 향했다. 궁전 외관 이곳저곳을 뜯어보다 보니 하루 종일이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아쉬운 마음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콜로멘스코예를 떠났다. 얀덱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예카테리나 2세의 짜리찌노 궁전.



ⓒ누비, 짜리찌노 궁전 (Царицыно - Большой дворец)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잘 관리된 호수와 깔끔한 도보 양쪽에 심어진 가로수를 보는 순간, 베르사유 궁전이 절로 연상됐다. 차이코프스키가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건 노보데비치 수녀원이 아니라 바로 여기였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행복에 젖어 산책하듯 걷다가 마주한 민트색의 짜리찌노 궁전은 콜로멘스코예와는 다른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외관은 옥스포드의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을 연상시켰다. 곳곳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웨딩 촬영을 하는 연인들이 많아서 한층 더 행복해졌다.



ⓒ누비, 짜리찌노 궁전 뒤편
ⓒ누비, 짜리찌노 궁전 뒤편



내부로 입장하기 전에 일부러 궁전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너무나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벅찬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즐겁게 산책을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 티켓을 구매한 뒤 전시관에 들어섰다. 평탄치 않았던 궁전의 역사가 사진 및 그림과 함께 잘 설명되어 있었다.



관람 루트를 따라 걷다가 접견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흰색과 금색으로만 가득 찬 공간. 베르사유를 비롯한 다양한 궁전을 가봤지만, 개념 자체가 다른 압도적인 화려함이었다. 방의 입구부터 황제의 자리까지 걷는 동안 사치스럽게 아름다운 디테일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황제의 하얀 조각상 앞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뒤를 돌아 입구를 바라본 그 찰나, 신하와 손님을 맞이하는 황제의 위치가 얼마나 달콤한지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권력과 돈과 지위가 있는 자는 이런 기분이었구나.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만한 권위감. 우아함과 화려함으로 고상하게 짓누르는 압박감.



벽 상단의 아치들과 화려한 금장식이 계속 시선을 끌었고, 황제의 시야에만 닿는 2층 발코니도 매력적이었다. 섬세하게 꾸며진 천장과 벽면의 거울들, 촛대의 메두사 부조까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두 개의 입구 사이의 벽에 걸린 세 점의 그림마저 아름다웠다. 20분이 넘도록 방 하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구석구석 구경을 하고 있으니, 방에 서있던 안내원이 웃으면서 "Красивая(예쁘죠)" 하고 말을 걸기에 이르렀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고 또 한참을 감탄하다가 결국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누비, 창문 너머의 웨딩촬영



접견실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니, 이어지는 방들은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어 이탈리아 건축가의 손길까지 묻으니 다소 요란스러운 것도 있었다. 달의 여신 셀레나가 사랑했던 소년이 영원한 젊음의 대가로 영원히 잠들게 된 그림이 있는가 하면, 촛대를 들고 평화의 상징 월계수 나뭇잎을 안고 있는 여성이나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의 조각들이 많았다.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을 전시한 공간도 있었으나, 다음 일정이 있기에 바쁘게 일정을 마무리하고 짜리찌노에 작별을 고했다.



ⓒ누비, 이즈마일로보 시장의 마뜨료쉬까



이즈마일로보 시장은 수요일과 주말에만 열린다고 하여 부득이하게 동선이 길어졌다. 러시아의 대표 기념품인 마뜨료쉬까를 가장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후 일정에서 모스크바는 물론이고 상트의 수많은 기념품 가게를 둘러본 결과 사실이었다. 마뜨료쉬까 이외에도 옷이나 마그넷, 엽서 등등 온갖 기념품을 판매하니 관광객으로써 한 번쯤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즈마일로보의 매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누비, 이즈마일로보 시장 (Усадьба Измайлово)
ⓒ누비, 이즈마일로보 시장



디즈니의 공주와 왕자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화려한 외관에 정신이 쏙 빠졌다. 개성 가득한 건물의 다채로운 디테일이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온갖 종류의 동화가 한데 모인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어서 얼떨떨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후 5시 반에 도착하여 파장 분위기였다. 사람이 북적북적한 시간이었다면 훨씬 흥미진진했을 텐데. 그래도 아직 장사를 접지 않은 매대들이 남아 있던 덕분에, 친구는 귀여운 고양이 가족 마뜨료쉬까를 입양했다. 공산품이 아닌 수제 마뜨료쉬까는 인형 바닥에 제작자의 친필 서명을 반드시 남기므로 그걸 꼭 확인하고 구매해야 한다.



ⓒ누비, 이즈마일로보 시장



내부에 박물관과 독특한 상점도 많다. 1층에서 고른 고기를 바로 바비큐로 만들어서 2층에서 식사하는 식당도 많은데, 늦게 도착한 탓에 어떤 것도 맛볼 수 없었다. 극악한 동선을 짠 탓에 짙은 아쉬움이 남아버렸다. 이 또한 다음 만남을 기약해본다. 하도 많이 걸어서 퉁퉁 부은 발을 끌고 얀덱스에 몸을 실었다. 퇴근시간인 탓에 1시간 가까이 소요됐다. 구글링으로 찾은 무무(Mu-Mu)라는 뷔페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길 건너편의 Eliseyevskiy 슈퍼마켓까지 방문했다. 화려한 궁전 같은 내부가 독특한 곳으로, 가격대는 좀 있는 편이다.



그렇게 일정을 끝내니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원래 볼쇼이 극장의 야경을 보려고 했으나, 너무 피곤하여 그냥 평범한 길거리의 불빛에 만족하기로 했다. 비슷한 경험을 나눠가졌기에 공유할 수 있는 감성이 새삼스레 감사했던 건, 벅찬 일정을 기꺼이 함께 해준 소중한 친구 덕분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퇴사를 한 덕에, 이토록 사치스럽게 긴 여행을 함께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부디 이 기적 같은 기회가 또다시 주어지길 바라본다.




모스크바 3일 차

북유럽과 비슷하게 날씨가 꽤나 오락가락하므로 날이 조금이라도 궂으면 우산은 필수

러시아의 궁전은 경로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음

궁전과 박물관의 방마다 안내원이 있음

콜로멘스코예와 짜리찌노 모두 공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니 여유 있게 산책하는 것을 권함

마뜨료쉬까는 이즈마일로보가 저렴한 편

마뜨료쉬까 인형 바닥 꼭 확인하기

이즈마일로보는 점심시간~오후3시 정도를 추천

호수의 작은 섬에서 바라보는 이즈마일로보 시장 야경이 무척 아름답다고 함 (못봐서 아쉬움)

3일 차 경비 약 5,000 루블 : 콜로멘스코예 제반 (800루블) + 짜리찌노 (400루블) + 식사 (2,000루블) + 택시 및 기타 (1,500루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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