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퇴사여행 in St. Petersburg - 들끓는 혁명과 예술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4일 차로 돌아오자. 동행을 먼저 떠나보내고 쓸쓸해지리란 것을 예상했기에, 이날 오전 일정은 백야나라의 "트로이카 문학과 혁명"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죄와 벌>을 집필한 센나야 광장 근처의 알론킨 주택을 비롯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K-다리와 주인공이 살던 아파트의 구조를 직접 마주하며 생동감 있게 고전을 체험했다.
3번(트로이카) 트램을 타고 마르스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을 만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를 외면한 그들이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는 억울한 죽음들은 누가 어떻게 위로하고 기려야 한단 말인가. 타인의 터전을 빼앗기 위한 명분 없는 전쟁은 당장 끝내야만 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레닌의 동상 앞에서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이라는 이념적 가치를 되새기고 싶다면,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마주하며 미래를 바꿔야만 하지 않겠는가. 레닌그라드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투어가 끝난 뒤 아까 트램으로 지나왔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향했다. 여기서 사소하지만 즐거운 경험을 했다. 러시아 트램에는 직접 운전을 하는 기사와 더불어,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것을 확인하는 직원이 늘 있다. 그 어린 남자 직원에게 피터폴 성당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느냐 묻자 열심히 설명을 해주더라. 고맙다고 인사하고선 구글맵 GPS를 보며 이동하는데 내려야 할 것 같은 역이 보였다. "Пожалуйста?" 하고 물었는데 아니라길래 갸우뚱하면서도 일단 앉아있었다. 이내 트램이 좌회전 대기를 기다리며 서자,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더니 운전하는 차장에게 뭐라 말을 걸었다. 하지만 중년의 여성 차장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딱 봐도 혼나는 모양새라 눈치껏 자리에 다시 앉았다. 결국 피터폴 성당을 오른편에 두고 네바 강을 건너는데, 상황이 귀엽고 웃겨서 배실배실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어린 직원은 여행자를 향한 선의로 정류장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서 잠깐 트램의 문을 열어줄 요량이었겠고, 차장의 입장에서는 합의되지 않은 규칙 위반이 당연히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으리라. 다리를 건너는 길에 차량에 붙어있는 트램운전사 자격증이 눈에 띄었는데, 자격증 상의 숫자가 차장은 만 구천 번 대였고 어린 직원은 오만 번 대였다. 까마득한 두 숫자의 간극을 보니, 후배 직원의 오지랖이 얼마나 패기 넘치는 일이었는지가 더욱 와닿아서 고맙고 유쾌했다.
그렇게 트로이스키 다리(Троицкий мост)를 트램으로 한 번, 도보로 한 번 건넜다. 웃음을 삼키면서 내다본 트램 창 너머의 네바 강과 몽실몽실한 구름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이 풍경을 만나기 위해 옳은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에서 하차한 뒤 도보로 다리를 건너는 내내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이렇게 혼자 여유를 부리고 있자니 비로소 홀로 여행의 소박한 즐거움이 오롯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람은 엄청나게 불었지만, 날씨도 색감도 분위기도 완벽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는 작은 섬 전체가 박물관 단지이며, 건물들의 내부 입장만 유료이기에 강변과 광장 산책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요소요소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섬 입구의 매표소에서 박물관 통합 티켓을 구매하여 이곳저곳 구경했다. 전시품 옆에 적혀있는 설명 대부분이 러시아어로만 적혀 있어서 상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흔히 보지 못한 그림과 미니어처와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혁명가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들이 수감됐던 감옥도 있다.
피터폴 성당(Петропавловский собор) 안에는 예카테리나 대제를 비롯한 러시아 황제들이 잠들어있다. 내부의 독특한 색감이 휘황찬란한 금빛과 어우러져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입장료가 비싼 편이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러시아에 왔으니 당연히 발레를 봐야지! 다만 일전의 모스크바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7월 말~8월 초의 여행 기간이 볼쇼이나 마린스키 등 주요 발레단의 휴가 기간과 정확히 겹쳤다. 아쉬움을 머금고 해당 기간에 볼 수 있는 공연을 검색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로보스키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기로 했다. 발레는 군무가 많은 공연인만큼 살짝 뒤편의 중앙 자리가 시야는 제일 좋겠지만, 뒤로 갈수록 관크가 심하리란 것이 자명했으므로 안전하게 1열 정중앙을 선택했다.
숙소에 들러 이 일정만을 위해 한국에서 일부러 챙겨간 원피스와 단화를 꺼냈다. 한국에서야 추리닝에 슬리퍼 바람으로도 대학로에 일상적으로 들락날락 거리지만, 러시아까지 가서 발레라는 문화를 향유하는데 기본적인 TPO는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에서 미하일로브스키 극장(Михайловский театр)의 입구를 찾는 것부터 모험처럼 설렜다. 외투를 맡기고 팸플릿을 받아 든 채 미로 같은 통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처음 관극했던 때처럼 심장이 뛰었다. 객석 문이 열리자마자 첫 번째로 입장했고, 영화에서나 본 고풍스러운 객석과 박스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와, 이런 곳에서 발레를 보게 되다니!
대체제가 거의 없는 시즌이기 때문인지, 객석에 관광객이 유난히 많았다. 1열을 선택한 스스로의 선견지명을 자찬하면서 오케스트라 피트에 앉아 악기를 조율하는 연주자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보면대 위에 놓인 낡고 손 때 묻은 지휘자의 악보를 발견하여 설렘은 한층 커졌다. 첫 발레 관람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하다니, 여러모로 각별할 수밖에 없는 벅찬 경험이었다. 새로운 장르의 매력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4일 차
트램은 당연히 정해진 정류장에서만 하차 가능
예기치 못한 호의가 따뜻한 추억을 남기기도..
피터폴 성당 내부 입장 강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산책도 추천
발레 비수기 (7월 말-8월 초) 기억하기
발레 관람 시 기본적인 TPO 갖춰야 함
공연장 건물 입장 후 바로 외투와 짐 맡겨야 함
4일 차 경비 : 피터폴 박물관 통합권 (750루블) + 백야나라 트로이카 투어 (39,000원) + 발레 관람 (USD 95.73) +트램/식사/간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