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궁전, 궁전, 궁전

첫 번째 퇴사여행 in St. Petersburg - 황권의 흔적들

by 누비

200여 년 동안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기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지는 물론이고 도심 주변부까지 제국의 발자취가 한가득 묻어난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전들의 내외부와 드넓은 정원을 거듭 만나보자니, 군주제를 무너뜨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차근히 갖춰간 도시였다는 생각도 든다. 결과적으로는 아래에서부터 직접 끌어내린 황권의 잔재를 관광상품 삼아서 자본주의의 특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현재의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상당히 모순적으로 느껴져 흥미로웠다.



20190807_002.JPG ⓒ누비, 파블롭스크 공원과 파빌리온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버스를 타고 꽤나 달려 도착한 파블롭스크.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데, 러시아 제국 황실의 교외별장 겸 주거지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꽤나 고즈넉한 시외 분위기이며, 러시아인이 아닌 경우는 단체 위주의 방문객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이 지긋한 매표소 직원이 입장권을 끊어주며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어디서 알고 왔느냐 묻는 환영이 사뭇 다정했다.



파블롭스크 공원(Павловский парк)은 말을 타고 사냥을 해도 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다. 입구의 지도만 봐도 기함이 나올 정도여서, 도보로 구경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공원 내부를 운행하는 작은 열차를 탔다. 3~4량 정도의 열차가 덜컹대며 공원 깊숙한 곳까지 누비는데, 내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녹음된 가이드 설명이 러시아어라서 내용은 전혀 이해를 못 했다. 하지만 탁 트인 공원을 시야 가득 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느라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 놀랍다. 심지어 탑승했던 차량 사진도 안 찍어놨네. 가격대는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20190807_001.JPG ⓒ누비, 파블롭스크 궁전
20190807_011.JPG ⓒ누비, 파블롭스크 궁전



열차를 타고 공원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개장 시간에 맞춰 파블롭스크 궁전(Павловск музей) 앞에 갔는데, 다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처음 입장했을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단체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차분한 관람은 쉽지 않았으나, 앞뒤로 영어를 사용하는 팀이 있어 소소하게 주워듣는 재미는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상품이 있다면 단체 관람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20190807_016.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흐리던 날이 이내 궂어지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깜빡해서 비를 맞으며 파블롭스크 옆의 예카테리나 궁전으로 향했다. 푸쉬킨스키 구(Пушкинский район) 안에 파블롭스크 시와 황제의 여름 별장 예카테리나 궁전(Екатерининский дворец)이 있는 푸쉬킨 시가 있다. 이 푸쉬킨 시가 "황제의 마을"이란 별칭을 지녔다. 페테르고프 여름궁전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우아한 하늘색의 사랑스러운 예카테리나 궁전은 흐린 날씨에도 북적거렸다. 긴 대기줄에 한참 서 있어야 했고, 내부 보안인원이 매섭게 관광객들을 스캔하며 짐과 외투는 무조건 맡기라고 제지를 가하는 모습이 과하게 빡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부로 입장해 방들을 마주하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20190807_033.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20190807_032.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20190807_031.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20190807_034.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러시아 바로크 양식을 차용한 이 화려한 궁전은, 방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매혹적이었다. 번쩍이는 황금빛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는데, 특히 가장 유명한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호박방(Янтарная комната)은 언어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호화로웠다. 호박방 촬영은 금지되어 있어서 별도의 사진은 없지만, 설령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해도 실물의 위압감을 제대로 담지 못했으리라.



20190807_036.JPG ⓒ누비, 예카테리나 궁전



궁전이 좌우로 넓어서 내부 구경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떼며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여전히 흐리멍덩했지만, 그 와중에도 예카테리나의 파스텔톤 색감은 반짝이며 시선을 끌었다. 꽤 떨어지는 빗방울에 정원 산책은 어려워 보였다. 궁전 바로 옆의 로마 신전처럼 생긴 누각(Камеронова Галерея)에 올라서서 드넓은 연못과 정원을 배경 삼아 셀카 인증샷을 몇 장 찍으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20190807_037.JPG ⓒ누비, 예카테리나 정원 (Екатерининский парк)
20190807_039.JPG ⓒ누비, 예카테리나 정원
20190807_040.JPG ⓒ누비, 에르미타주 파빌리온 (Павильон "Эрмитаж")



보정을 하나도 하지 않아서 사진은 전부 흐리고 어둡지만, 비 덕에 나름 운치 있는 풍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이동과 구경에 지쳐버렸기에, 에르미타주 정원 탐방은 후일을 기약하며 걸음을 돌렸다. 다시 버스를 타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숙소로 돌아와 젖은 몸을 말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원래 여행 중에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나서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번 러시아 여행은 일정이 길기도 했고, 무엇보다 밤이 늦게 찾아오는 편이어서 이렇게 종종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성 이삭 성당 앞에서 미리 받아온 팜플렛을 참고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 야경 투어를 위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섬과 섬을 잇는 도개교가 열리는 시간이 새벽 1시 전후이기에, 도개교를 보기 위한 야경 투어는 자정 무렵에 출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출발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도착하여 기다렸다. 강바람이 차니 여러 겹으로 단단히 입는 건 필수! 자리마다 담요가 구비되어 요긴하게 사용했다.



20190807_122.JPG ⓒ누비, 크루즈 야경 투어 - 도개교
20190807_125.JPG ⓒ누비, 크루즈 야경 투어 - 도개교



어두워서 사진 상에 잘 담기지는 않았지만, 도개교가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유람선이 열댓 척도 넘었다.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도 지나칠 때마다 서로의 배에 안녕, 하며 손인사를 건넸다. 도개교가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드라마틱하다기보다는, 늦은 밤이라는 시간과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과 유람선으로 강을 누비는 상황 자체가 달콤하고 로맨틱했다. 잔잔한 물결 위로 찰랑대는 옅은 빛의 무리가 시시각각 추억을 미화했다.



20190807_097.JPG ⓒ누비, 크루즈 야경 투어 - 에르미타주



볼 때마다 설레는 에르미타주에게 작별을 고하며, 1시간 반 남짓의 야경 투어를 마쳤다. 숙소에서 선착장까지 도보로 이동했는데, 꽤 늦은 시간이어서 조금 무섭긴 했으나 길에 사람 자체가 거의 없어서 괜찮았다. 그래도 안전을 중시한다면 미리 동행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실질적인 마지막 날인 여행의 11일 차는, 사진이 별로 없다. 가볍게 다니고 싶어서 카메라를 두고 나왔기에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뿐이다. 조식을 먹고 러시아 미술관으로 향했는데, 하필 관람이 오후 1시부터인 목요일이었다. 넵스키 대로를 따라 기념품을 구경하면서 계란 공예 박물관(Музей Фаберже)으로 향했다. 18세기 궁전을 바꾼 박물관으로, 황제를 위한 보석과 파베르제의 달걀이 전시되어 있다. 크렘린의 무기고가 워낙 강렬했기에 엄청난 감동은 없었지만, 화려한 것을 사랑하면서도 세심하게 디테일에 집착하는 러시아의 성향을 새삼 통감했다. 보석 공예사나 쇼콜라티에 같은 예술 감각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어마어마하게 영감을 받으리란 생각을 했다. 전시품의 컨셉을 참고하여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는 재능이 나에게도 있었더라면!



20190808_16.jpg ⓒ누비, 계란 공예 박물관 전시품



유명하다고 하여 한아름 구매한 러시아 꿀을 두고 나오기 위해 택시로 숙소에 돌아갔다. 날이 후텁지근해서 코트를 벗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꾸물거리기 시작한 날씨를 무시하고 무겁다는 이유로 우산을 두고 나왔다. 긁어모은 동전으로 삐쉬끼 3개를 사서 점심으로 먹고, 오전에 실패한 러시아 미술관(Русский музей)으로 들어갔다. 입장 후 안내 표지를 따라 미로 같은 통로를 걷다가 레드카펫이 깔린 2층 계단을 올라가게 되는데, 전시관들이 정말 예뻐서 작품보다 방 구경에 더 집중했다.



20190808_44.jpg ⓒ누비, 러시아 미술관



천장화의 화려한 금테 부각 장식이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전시품 자체는 전반적으로 남성적 시각의 회화가 많아서 재미가 없었다. 신관에는 19세기 이후 러시아 작가 위주의 작품들인데, 대부분 군인이 주인공인 전쟁화여서 취향이 아니었다. 분명 얼마 전 모스크바의 트레치아코프 미술관에서 봤던 작품이 있어 놀랐는데, 모조품이라는 설명 덕에 의문이 풀렸다.



미술관을 나와 그대로 쭉 걸어서 푸쉬킨 박물관에 가려고 했다. 다만 가는 길에 마뜨료쉬까 등을 파는 기념품 매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마뜨료쉬까 두 개를 사기 위해 결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 아래에서 비를 그었으나 쉽게 지나갈 구름이 아니었기에 그냥 숙소까지 뛰어가기로 결심했다. 스콜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완전히 꼴딱 젖은 채로 간신히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결국 운동화는 버리고, 발레를 보기 위해 챙겨 온 구두를 꺼내 들었다.



20190809_10.JPG ⓒ누비, 러시아 여행 기념품
20190809_09.JPG ⓒ누비, 러시아 여행 기념품
20190809_07.JPG ⓒ누비, 러시아 여행 기념품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니, 우산을 쓰고 비를 뚫고 나가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볼 의욕이 바닥을 쳤다. 결국 며칠 전에 사다둔 스파클링 음료와 체리 술을 마시며 저녁을 대충 때우고선 짐을 정리했다. 끊이지 않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아쉬움은 뒤로 한 채 쿨하게 휴식을 취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일정에 쫓기지 않고 내키는 대로 쉬는 것, 이것이 바로 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6일&7일 차

파블롭스크/예카테리나는 투어를 통해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을 듯

파블롭스크 공원 : 자전거 혹은 내부 열차 추천

궁전/박물관 관람 시 짐과 외투는 필히 맡겨야!

네바 강 유람선 야경 투어 강추! 따숩게 입기!

시간이 있다면, 계란 공예 박물관도 추천

어지간한 기념품은 넵스키 거리에서 해결 가능

피의 구원사원 근처 매대는 가격 흥정 가능

마뜨료쉬까를 하나도 사지 않으면 후회하리라

여행은 언제나 여행자의 컨디션에 맞게 :)

6일 차 경비 : 파블롭스크 궁전 (600루블) + 예카테리나 궁전 (사전예약, 1,500루블) + 유람선 야경 투어 (800~900루블) + 식사/버스 등

7일 차 경비 : 계란 공예 박물관 (500루블) + 러시아 미술관 (500루블) + 기념품 쇼핑 (nnnn루블) + 삐쉬키 등

8일 차 경비 : 시내~공항 택시비 (1,300루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9 문학과 역사, 그리고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