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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낭만 따위 없는 첫 만남

D+1 | 나는 지금 왜 이 길 위에 서있는가

by 누비
시작. 생장(Saint-Jean-Pied-de-Port)
종료. 오리손(Auberge Borda)
해냄. 4시간 / 8.39km


산티아고 1일차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즐겨 읽었던 장르는 여행기였다. 가보지 못한 세상을 먼저 경험해 본 이들의 감상은 즐거운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특히,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독보적인 감수성은 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버킷리스트의 최상단을 차지한 산티아고는 비현실적인 이상향으로 고착됐다. 사회인이 되자 "800km를 40일 동안 걷는다"는 사실 중에서 "끝없이 걷는다"보다 "40일이 필요함"에 방점이 찍혔다. 여유롭고 자기 성찰적인 순례길에 대한 환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산티아고 길에 서기만 한다면, 미처 몰랐던 내면의 질문들을 끄집어내어 깊이 고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시작 인증샷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미화되며 왜곡된 이 환상은, 걸음을 시작한 지 1시간 반 만에 와장창 깨지고야 말았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 가장 험난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중간에 1박을 하기로 한 선택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이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이며, 차들이 끊임없이 옆을 스치며 쌩하니 지나간다는 점은 미처 몰랐다.


노파심으로 배낭에 꾹꾹 눌러 담았던 수많은 물건들이 어깨를 짓눌렀다. 일만 미터 상공에서 시작된 대자연 2일 차의 몸 컨디션은 다리를 더욱 축축 처지게 만들었다. 생장에서 산 달콤한 딸기나 시원한 물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구불거리며 휘어지는 오르막은 한숨만을 불렀다.


여기까지만 걸을만 했음


이 멋대가리 없는 미친 도로가 정녕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의 도입이 맞는 건가. 등 뒤로는 나름대로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으나, 풍경을 감상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생장을 출발한 이후 사진은 딱 4장 찍었다. 사색은 고사하고, "힘들다"는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다. 딱 하나의 생각은 계속 맴돌았다. 이 길을 걸었던 수많은 순례자들의 긍정적인 간증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산티아고에 도달한 순간 첫날의 고단함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걸까. 힘겹던 걸음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킬 만한 무언가를 중후반부의 길 위에서 만난 걸까.

생생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상을 남겨야만 한다는 결심이 섰다. 가장 시니컬한 순례길 후기를 기록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마저 생겼다.


멀리 보면 평온함, 발 밑을 보면 고통


지금 나는 여전히 순례길 위에 서있다. 왜 그토록 이 길을 선망했던 것인지, 스스로 계속 되묻고 있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야 숨을 돌리고 몇 문장이라도 적을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조만간 뭐라도 단서를 찾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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