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부터 롱세스바예스까지. 피레네 산맥을 넘는 대략 25km 길이의 순례길을, 한국인들은 보통 하루 만에 해치운다고 한다. 새벽에 생장에서 출발해 오후 2~3시 전후로 도착하는 일정이란다. 보통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두엇 만났다.
동키란 무엇인가 하면, 이 마을부터 저 마을까지 배낭을 옮겨주는 서비스다. 돈만 내면 가벼운 몸으로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정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순례길의 특성을 기반 삼은 것으로, 사업체가 최소 4~5개나 될 정도로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다.
봉투 안에 현금, 뒷면에 이름/연락처/도착지 기재
생장부터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필히 동키를 이용하시라 강권한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선까지 넘어야 하는 이 길은, 등산으로 단련된 한국인이 걷기에도 녹록지 않다. 특히나 여행 초반이기에 가장 무거울 배낭을 메고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의 경험담이니 부디 새겨들어주시길.
순례길 2일 차, 이 길을 걷기로 한 결정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무지를 끼얹은 지나친 동경은 몰이해와 다름없었다. 적당히 걸을만한 길이 되리라는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를 즐기리란 자신감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실없는 잡념조차 이어지질 않았다. 힘들었다.
첫날의 걸음은 내 순례길이 이럴 리가 없다는 불신과 그래도 끝내 갈망하던 여기에 섰다는 오기였다. 6개월 전에 예약한 보르다 산장에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예약일이 내일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하는 주인 때문에 다 때려치울 뻔한 순간도 있었다.
구름의 바다를 발 아래에
둘째 날의 걸음은 그래도 시작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피레네 산맥을 감싼 아침 안개가 햇볕으로 서서히 걷히는 모습이나, 구름을 향해 점차 나아가는 기분이 사뭇 벅찼다. 활짝 웃는 얼굴로 첫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8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비일상적인 행위가 4시간을 넘어서자 온몸이 빠르게 지쳐갔다. 발에 치이는 자갈이 발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올라온 만큼 가파르게 이어지는 내리막은 무릎과 발목에 더욱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이 걸음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왜 시간과 돈을 쏟아 이 고생을 자처했는가.
떠나오기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후회의 불씨가 솟아나자 조금 눈물이 났다. 얼마 전 처음으로 PT를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이 차올랐다. 내려갈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기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기에 오롯이 나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막막한 현실.
멈춰 설 수 없는 길 위에서 망연함을 절감했다.
시야에 빤히 잡히는 마을에 도달하기 위하여 1시간이 넘도록 걸어야 하는 것 또한 고통을 가중시켰다. 눈에 보이지만 쉬이 닿지 않는 희망 앞에 선 인간은 이토록 절실하고 애절할 수밖에 없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순례자들이 결국 나를 앞질러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각자의 걸음은 참 다르구나, 동키를 택한 현명함이 부럽구만.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을 롱세스바예스 유일의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고 또 생각했다. 저마다의 찰나는 다를지언정 결국 종착지에서 만나게 되는 인생이여. 이것이 까미노의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