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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Oct 15. 2023

나 뭐 먹지?

작은 가게의 단호한 친구들

 과단성이 부족하다.

 고민과 망설임을 밥보다 더 먹고사는 나는, 작은 가게에서 결단을 배운다. 시원시원한 고객님 문장에서 지지부진했던 숙제의 답을 얻는다.

 더 빠져든다. '여기까지만 읽고 자야지' 하다 결국 밤을 새우게 만드는 책처럼 작은 가게는 '여기까지만'을 잊게 만든다.

작은 가게는 책입니다. '한 페이지만 더, 한 페이지만 더'




 긴 머리 고객님, 키오스크에서 음료를 이것저것 눌러보는 친구를 재촉한다.

 “야 뒤에 사람 있잖아. 얼른 골라. 사람 기다린다고~."

 그러자 메뉴를 누르던 직각 단발의 친구가 답한다.

 “뭐래. 나도 사람이거든!”


 아하. 뒤에 줄 선 사람만 사람이 아니고 나도 사람이었네! 앞의 사람, 뒤의 사람, 곁의 사람,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사람 눈치 틈으로 미끄러져온 마흔셋 단전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나도 사람임'을 곧잘 잊으면서 사람 냄새는 풍기고 싶어 하다니! 갑자기 앞머리를 자르고 싶은 건 왜일까. 그것도 자 대고 자른 듯 확실한 일자로.


 책에서도 깨우치지 못했던 바를 깨워준 클레오파트라 단발머리 여고생께, 존경을 듬뿍 담아 음료를 전한다.


 앞으로도 난 여전히 내 뒤에 줄이 생기면 서두르겠지만, 어려운 관계의 줄다리기에서는 나 자신에게 사람으로서의 의견을 먼저 묻겠다 다짐한다. 상대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나까지 행복하면 더 좋잖아. 나부터 즐거우면 함께 즐겁잖아. 나도 내가 원하는 메뉴를 탐색할 권리가 있잖아.


 작은 가게에 박힌 영혼이 가여워 영생과 천국을 선물하시려는 종교인 분들께도 당당히 화낼 것이다.

 "뭐래. 저도 사람이거든요!"




 (일주일에 최소 3번 오리지널 스무디를 주문하시는 고객님) “사이즈업 할까 말까!”

 (늘 함께 오시는 고객님) “너 사이즈업 해도 다 먹잖아. 안 남잖아. 그럼 사이즈업이지!”

남으면 기본사이즈, 안 남으면 사이즈업. 쉽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읽고 이런 느낌이었지.

 간단하다. 사이즈 업해서 다 먹으면 네 사이즈는 그게 맞아. 남으면 아닌 거고. 스무디를 만들며 배운 ‘남나 안 남나’ 공식은 일상에서 쉽게 적용 가능하다.


 우유를 하나 살까 두 개 살까. 지난번 우유 하나 금방 마시고 부족했잖아. 그럼 두 개지.

 카레용 고기팩 하나 살까 두 개 살까. 지난번 카레가 남았잖아. (물론 내 요리 실력 탓이겠으나) 그럼 하나지.

 연락을 할까 말까. 지난번 대화 후 여운이 남았잖아. 그럼 해야지.

 만날까 말까. 지난번 만남 후 미련이 없었잖아. 그럼 말아야지.


 작은 컵인지 중간 컵인지 큰 컵인지 내 양을 잘 알고 맞는 컵을 선택하기. 그 어려운 일의 기준을 고객님 스몰토크 엿듣기에서 명료히 배운다.


 선택이 어려운 일이 있으시다면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라.

 "지난번에 남았니 안 남았니?"




 이상한 일이다. 마흔이 넘고부터 친구에 대한 고민이 사춘기 때보다 깊어졌다. 딱 40세에 가게를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시간이 고파진 탓일 수도 있겠다. 만날 시간은 없고 그러다 보니 그간 어려웠던 사이들은 더 어려워진다. 어릴 때 관계의 '확장'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축소'가 과제다.


 카운터에서 음료를 기다리던 한 학생이 친구 이야기를 한다. 불편한 상황인가 보다. 말끝을 흐리는 친구에게 명암이 또렷한 화장을 한 친구가 눈썹칼 같은 답을 날렸다.

 “걔는 니 짱친이 아니야!”


 명쾌한 문장에 요란하던 스무디 블렌더 소리가 물러선다. 아. 내 고민이 들켰나. 그러게. 생각해 보니 그 언니와는 짱친 사이가 아니네. 제대로 맺지도 제대로 끊지도 못하는 내가 그 언니에게도 짱친은커녕 짱(‘짜증’의 줄임) 나는 친구였겠다.

짱 단호한 고객님께서는, 음료도 짱 화끈하게. 얼음까지 원샷.

 ‘짱’의 기준 역시 어디에나 통한다. 애매한 대상 앞에 ‘짱’을 붙여보면 해결이다.

 퇴근 후 급박하게 밀려드는 허기에 즉각 섭취로 답하기보다 ‘짱’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짱배고픔인가! 내가 저녁을 안 먹었나?’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저녁밥을 먹었으니 짱공복도 아니잖아~‘하며 스스로를 타이를 수 있다. (물론 ’그건 요기일 뿐, 짱식사가 아니잖아. 좀 먹어야 잠이 온단 말이야‘ 하는 내가 이기고 만다. 짜증.)

 11시간 넘게 일했으니 쓰러지고 싶은데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이 맞나? 의문이 들 때 '짱'을 꺼낸다. '쓰기가 네게 짱행복이니?' 벌써 입꼬리가 올라간다. 즐겁네. 맞다. 쓰기는 내게 짱기쁨이다.



 

 고객님들과의 스몰토크 틈틈 이웃분들과도 수다를 나눈다. 좀 색다른 단호함도 있다.


 새롭게 친해진 이웃 사장님. 이야기를 좋아하시고 해맑은 분이시다.

 주력 상품의 성격상 자꾸 엄마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 친정엄마가?" 하실 때, 가볍게 "아 저희 엄마는 돌아가셨어요." 하고 답했었다. 며칠 뒤 다시 "친정엄마가 해주셨구나!" 하셔서 멈칫. 돌아가셨다는 표현이 부드러워 기억 못 하시나 싶어 '죽었다' 말씀드렸다. 도돌이표로 이 대화가 한 번 더 반복되어 그때는 '안 계신다' 이야기했고, 이후 두세 번 더 등장한 엄마 이야기에 대충 넘어가고 있다. (서로 바빠 대화를 구석구석 듣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매일이니.) 사장님께 나는 친정엄마 품 안의 사람이다.

 사장님께서 엄마의 부재를 단호히 거절해 주시니 엄마 향기가 밀려온다.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미용실에 앉은 시현이가 거울 속에서 나를 보듯 참여 수업 중 준우가 돌아보며 나를 찾듯 나도 내 곁의 엄마가 다시 든든하다.


 2015년 9월 7일 엄마가 사라진 그 순간 그 심정 그대로 반복해 무너지는 내게, 이웃사장님께서 단호히 '그 순간을 잊어. 엄마는 계신 거야. 맛난 약과를 보면 엄마와 함께 먹을 생각을 하면 되고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 만날 생각을 하면 되는 거야. 이별만 기억하면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함께인 순간만 기억해. 그게 좋아.'하시는 것 같다.


 아픔에서 과감하게 일어서는 법도 배우는 작은 가게. 내일의 페이지가 벌써 설렌다.



"나 뭐 먹지? 딸기할까 초코할까!", "넌 딸기 아니야 초코지!"


"스몰토크 이어지는 작은 가게는 제게 귀여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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