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은 없지만 뒷이야기는 기대하세요.
“동전으로 살 건데요. “
작은 가게 카운터에 올려지는 동전들은 제각각 귀여운 사연을 품고 있다.
아르바이트 급여(엄마 심부름)인 백 원, 아빠 지갑이 무거워져 받게 된 백 원, 사라진 포켓몬 카드를 찾다 발견한 백 원, 동생과의 내기에 이겨 획득한 백 원, 학원 책상 밑 벌레를 잡다 보인 백 원. 백 원이 모여 1500원, 2500원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듣게 되면 '이 돈을 받아도 될까' 멈칫한다. 유리병 가득 담긴 종이학 받아 든 소녀처럼 동전 얹힌 작은 가게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감당 가능할 정도까지 열심히‘였던 초심은 아가의 동전에 지고 만다. ’감당 가능‘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초심 잃은 사장은 ‘점심 겸 저녁 10분 안에 해결하기’, ‘요의 3시간 참기’, '안녕하세요 인사 연속 10번 모두 다른 느낌으로 말하기, 진심이 전해지도록' 등 괴상한 챌린지를 스스로에게 제안한다.
동전과 바꾼 초코 버블티를 앞에 두고 서로의 장래 희망에 대해 나누던 하교 티타임. 이런 문장이 들려왔다.
“난 댄서가 되고 싶어.”
“야! 그냥 네가 춤을 추잖아. 그럼 그때부터 넌 댄서가 되는 거야!”
콩닥였다. 작은 가게 안에만 머무르던 마음에 날개가 달린다.
‘그래. 춤추면 댄서가 되고 쓰면 작가가 되고 살면 사람이 되겠지.‘
거친 파도를 완벽한 모습으로 넘겠다 상상만 하지 말고 시작도 하기 전에 겁먹어 제풀에 포기하지 말고 그저 물을 딛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라고 방과 후 동전토크는 말한다.
“사장님, 오늘은 학원 가기 좋은 날예요.”
“오 좋은 일 있는 날인가 봐요. “
“지난번에 책 한 권 다 끝났거든요.”
“아 그럼 오늘은 이벤트가 있나 봐요.”
“아니요. 새로운 책을 받아요.”
“아 새 책이라 좋아서 그렇구나! “
(‘이 아주머니 참…… 핵심을 못 알아차리시네.’ 싶은 눈빛의 2학년 고객님.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생각을 좀 해보세요.’가 생략된 듯한 설명을 전한다.)
“아니요. 새 책으로 배우면 처음에 진~짜 쉬운 것만 나오잖아요. 오늘은 놀면서 해도 돼요. “
동전 토크에서 배우는 통찰!
아. 어려운 마무리를 해내면 새 책의 쉬운 앞부분이 기다리니 반가운 날이구나. 맞네 맞네. 다짜고짜 어려운 학습지는 없었지.
스몰토크에 뒤끝은 없다. 어떤 과목 어디 학원이냐고 제목은 뭐냐고 그래서 성적은 좋으냐고 학원 다니기는 어떠냐고 질질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대화의 뒤끝 대신 내 일상으로 스며드는 새로운 뒷이야기가 피어난다. 회사 생활과 노후, 금리 상승 고민 때문인지 자꾸 이마가 넓어지는 남편에게 ‘제일 어려운 내용 뒤에 가벼운 내용이 온대’ 해본다. 서양 철학에 비해 동양 철학이 너무 어렵다 한숨 쉬는 시현(‘생활과 윤리’ 공부 중)에게 ‘첫 페이지로 돌아가봐. 그리고 다시 페이지를 넘기면 이해될 수도 있어’ 말한다. 혼자 새 프로그램으로 코딩을 해보려는데 뭔가(난 들어도 모르는 내용이라) 잘 해결되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준우에게 ‘대신 이 어려운 부분을 이겨내면 쉬워지는 때가 올 거야’ 답한다. ‘어려워서 어쩌지’하던 나의 소심을 ‘이것만 풀면 되잖아’ 하며 달래는 여유가 생긴다.
쨍. 소리 내며 떨어지는 동전이, 앞면 또는 뒷면 둘 중 하나이니 좀 단순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어려운 문제. 어려운 시험. 하면 떠오르는 얼굴.
작년 수능 전, 하루 두세 번씩도 들르던 고3 고객님. ‘수능 점심시간에 음료 마시러 올게요!‘ 농담을 던지더니 기어이 수능날 시험지를 흔들며 나타났다. 테이블 2개인 작은 가게, 주문줄 곁에 앉아 친구와 채점을 하다니. 음료를 만들면서도 ‘웃고 있나 울고 있나!’, 모르는 척하면서도 ‘시험지 두고 어디 가지!’ 덩달아 긴장했다.
집도 멀고 실기 준비도 바쁜데, 땀에 버무려진 머리칼이 반냉동 상태가 된 채로 “사장님~" 부르곤 했다. 힐링은 집 앞 카페에서 하라 징징거려도 또 다음날 나타나 하루 이야기를 전했다. 친한 형님이 닭갈비를 사주셨는데 면 사리, 볶음밥 다 추가해 먹었다며, “사장님 제 배 좀 보실래요?” 오늘은 빠진 체중이 76kg인데 5kg은 더 감량해야 해서, “사장님 저 오늘은 샐러드 하나 먹고 계속 굶었어요.” 생일에는 친구들과 한강에 다녀왔는데 감기 기운이 좀 보이지만, “사장님도 가보세요. 진짜 좋았어요.” 곧 교정기 때문에 치과에 갈 거라 타로 버블티를 지금 꼭 먹어야 하는데, “어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약과를 참았어요. 꿀도 발라져 있었는데요.” 극한 다이어트에 기운이 없어 고기를 좀 먹을 예정이라, “우둔살을 사 갈 거예요. 그게 좋대요. “
그렇게 매일 눈웃음을 남기다 하루는, 지방과 탄수화물, 당 그리고 장난기가 빠진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힘들어요. 사장님. 진짜. 하루에도 스무 번씩 포기할까 생각해요.”
고개를 떨구는 고객님 따라 나도 아래만 한참 바라보았다. 눈물이 떨어지려 해서 눈물보다 더 숙였다. 포기 아니면 버티기, 두 마음이 고무줄 양 끝을 팽팽히 당기는 것처럼 엄숙하고 위태롭던 침묵을 기억한다.
그날 고객님께서 남기신 스몰토크는 무거운 질문이 되었다. 근육 뭉친 다리를 절룩이며 집으로 가는 길을 걷는 뒷모습에 내가 저 아가보다 어른일까 생각했다.
하루에 스무 번씩 포기하고 싶던 일이 있었을까. 열 번 정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있겠으나 아마 난 스무 번이 되기 전 포기해 왔을 것이다. 처음부터 버거운 일은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견뎌야 삶인지 이겨야 삶인지 선택해야 삶인지 용기내야 삶인지 갈팡질팡 중인 40대에게 고3의 스몰토크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 묵묵히 걷는 것이 삶이라 말해주었다.
힘들다는 생각이 차올라 지칠 때, 게으름을 철저하게 버린 그때의 고객님 눈빛을 꺼낸다.
작은 가게에 작은 고객님들의 동전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큰 고객님들의 지폐 이야기도 꺼내볼까.
계절이 바뀔 때쯤 오셔서 오천 원짜리 한 장 꺼내시며 자몽차를 주문하시는 고객님.
“와 바뀐 헤어스타일이 멋져요!”
“거짓말도 잘하네! 멋지긴 무슨. 내가 몇 살인데! “
“왜요~ 더 건강해지시고 젊어지셨는데요!”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아? 팔십여덟! “
“와 정말요?”
팔십여덟이 88이었나 78이었나 68이었나 잠시 혼란스러웠다. 팔십여덟은 정확히 88임을 확신하며 내 눈과 입은 88 모양으로 크게 벌어졌다.
“참. 볼 때마다 열심히도 한다. 동네에 다 소문났어. 맛있고 친절하다고(사실 ‘예쁘다’ 고도 하셨으나 마스크 쓴 모습만 보셔서 하시는 말씀이니 생략하기로). 그럼 된 거야. 다 잘 되는 거야. 뭐든 이루어지는 거야. 자~ 그럼 또 만나!”
8분의 스몰토크에 88년의 결론이 전해진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아?’ 하며 으스댈 수 있는 건강과 위트, 어린 이에게 칭찬과 덕담을 건넬 수 있는 아량. 이런 단어들을 모아가면 행복한 노년이구나. 88에 비하면 43의 고민쯤은 귀여워진다.
중3 고객분들께서 동전을 가지고 오신다. 앗 이건 너무 많은데요!
"으아 저금통을 털어온 건가요!"
"맞아요. 3년 정도 모은 거예요."
"아니 그 소중한 돈을 왜 우리 가게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 온 반 친구들이 함께 모았다고 했다. 3년 함께 공부하고 각자의 길로 향하며 마시는 마지막 버블티. 신난 친구들 틈에서 또 혼자 벅차오른다. 미래로 내딛는 버블티를 전하며 웅장한 마음으로 배웅하자니 자막이 올라오는 듯하다. ‘이거 모아서 뭐 할까?’3년간 오갔을 말풍선 위로 굵은 글씨가 선명하다.
To be continued
작고 짧게 건네시는 귀여운 이야기들에 뒤끝은 없다. 그러나 투비컨티뉴드.
뒷이야기 꾸미기가 즐겁고 찾아올 뒷이야기가 설레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나의 뒷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고객님 다시 오셔 고객님의 뒷이야기 전하시니, 이 작은 가게에 점점 더 빠져들 수밖에.
"뒤끝은 없지만 뒷이야기는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