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가게에는 ‘빌릴 수 있는지’ 묻는 분도 등장하신다. 차비를 빌려달라는 분도 계시고 우산을 빌려달라는 분도 계시고 전화를 빌려달라는 분도 계시고 화장실을 빌려달라는 분도 계시고.
(아차! 믿음을 빌려달라거나 신용을 빌려달라는 방문은 어려워요. 거절합니다.)
빌리기 질문 중 가장 즐거운 주제는 '책'이다.
그냥 책을 빌려가도 되냐는 질문만도 즐겁지만, ‘책을 빌려갈 수 있다고 들었다’ 하시던 말씀이 오래 남는다. 책 빌린 이야기를 전해 듣고책을 만나러오셨다는 사연이 아기자기하다.책 대여도 가능한 버블티 가게! 그 귀여운 가게가 어디래? 아 거기! 도서관이 바로 옆이잖아! 사장이 누구래?(막상 방문하면 시시할 수 있어요. 글로 보는 편이 좋아요.) 혼자 중얼중얼. 이렇게 중독되어 있다. 나는 이 공간에.
책도 빌려주는 버블티 가게, 고객님께서 선택하신 책은요!
박연준 님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와 얼그레이 버블티를 들고 가시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거울에서 눈이 사라져라 크게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왜 이리 신나는지 이유를 찾았다.
책을 주고받는 일을 하고 싶다. 언젠가는. 꼭. 어떤 방식으로든. 책이 가운데 놓인 일을 하고 싶다.
“이거 빌려가도 돼요? 읽고 싶었어요. “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오던 아가. '단골' 이라고만 쓰기에 섭섭한 짱단골님이시다.
단독 방문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먼저 스몰토크를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짱단골 고객님은 음료를 주문하고 책을 펼치다 날씨를 물었고 안부를 물었고 그러다 인생을 물었다. 고1 때에는 시인이 되고 싶은데 시로 마음을 전하기 어렵다 했고('나태'에 대해 쓴 시를 낭송해 주기도.) 키가 훌쩍 자랐던 고2 때에는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 했고, 몰입을 위한 삭발을 했던 고3 때에는 경찰이 되고 싶다 했다. 대학생이 된 지금은 CEO를 꿈꾼다. 삶이 궁금할 때 책을 찾는 모습이 친근하다.
대가 없는 친절이 어려워 인간관계론을 펼친다 했고, 글쓰기가 어려워 글쓰기 책을 읽는다 했다. 얼마 전 자본주의에 대한 책을 들고 끙끙 앓으며 개념을 설명해 주는데, 3년 넘게 팔아온 음료 가격도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올봄 3월 2일, “오늘 대학교 첫 수업예요.”하며 커피를 주문했다. 대학생스러운 면티와 통 넓은 바지를 입고 검은 백팩을 메고 놀이공원 풍선처럼 부푼 표정이었다. 대학교 첫 수업! 20세의 시작에 마흔셋도 덩달아 들떴다.
"이거 읽고 싶었어요. 빌려가도 돼요?"
첫 등교일 신입생 군의 선택은 로맹 가리의 <그로칼랭>
건강 밥상을 배불리 먹고도 밍밍한 허기가 남아 아메리카노 대신 믹스 커피를 뜯을 때가 있다. 내게 그로칼랭은 머그컵 가득 담긴 노란 믹스 세 봉지이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달고 진하다. '낯선 문을 여는 첫날에 어울리는 책일까?', '처절한 외로움을 오늘 건네도 좋을까!' 생각했다. 프로 망상인답게, 이 친구에게 관심 생긴 여학생이 손에 든 책을 보고 주인공 쿠쟁의 심리와 같은 처지로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 고운 책을 맛있게 읽었다면 그런 오해를 할리없겠지 하며 허락했다.
“학교 앞 스타벅스에 가서 학교 도서관 책 읽지. 왜 무겁게 여기서 들고 가요~ ”
그로칼랭을 받아 드는 경영학도에게 고마워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소심한 나는 소감 말하기를 병적으로 어려워하니 고객님께도 책이 어떠했는지 묻지 않았다. (물론 먼저 말씀하기는 하셨지만!)
대학생활의 ‘열렬한 포옹’이 시작되길 바라며 책을 건넸던 날이 얼마 전 같은데, 벌써 2학기이고 가을이다.
지난 글의 문장처럼 ‘나도 사람’이니 열심에 지칠 때도 있다. 그럼 다시 초심을 뒤흔들기 위해 쪽지를 펼친다. 영어 선생님이신 어머님께서 아이 방을 청소하다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하고 바쁜 일정 중 짬을 냈다 하셨다. 아이가 이렇게 느꼈다면 어머님께서도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도 함께.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진심이 보여 사랑스러운 글. 솔직함으로 위로를 전하는 글.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어’ 하는 연애편지 같은 글.
아가의 글 앞에 부끄럽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고도 싶다.
내 이야기가 글이 되는 스몰토크도 있다.
‘우리 동네’에 대해 조사하는 숙제가 있는 때면 초등학교 2학년 아가들이 '가게를 하면서 힘든 일이 있냐' 물어주기도 하고, 중학교 2학년 아가들이 진행자와 녹음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한다. 4월에는 위에 등장했던 신입생 군이 대학 전공 과제로 인터뷰를 하겠다 하여 손끝을 덜덜 떨며 긴장하기도 했다.
내게 묻고 나의 답을 글로 써주는 친구들이 찾아오는 이 가게. 출근길이 점점 더 진지해진다.
아직 반납 전인 두 책의 제목에 살짝, ‘돌아오지 않겠다’는 힌트가 담긴 것 같기도 합니다^ ^
장난스럽게 안 돌려주면 어쩌려고 그러시냐 묻는 분도 계신다. 그럼 “저야 다 읽었으니 다른 분께서 소중히 읽으시면 그도 좋지요. 함께 읽게 돌려주시면 더 좋고요. “ 답한다.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책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꽤 긴 시간 대여 중인 두 권은 테라오 겐의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와 송길영 님의 <그냥 하지 말라>인데, 두 고객님께서 아직 답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있다. 어서 문제를 풀어내시길!
모나미 라이브칼라 트윈 타입 수성펜을 사랑해요. 덕분에 종종 ‘괄호 맞추기 퀴즈’가 됩니다. ‘기필코 번지지 않겠다’는 유성보다 ‘흐르면 번질 수 있지’하는 수성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고민하는 일이 있는데 답을 찾은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키오스크 옆에 놓인 박웅현 님의 <여덟 단어>를들고 멈추셨던 여성분께서 연극 대사 같은 문장을 남기셨다.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채우며 밤을 꼬박 새우고 나오셨다고. 연한 갈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눈을 가진 분이셨다. ‘근처에 볼일 보러 들렀는데 행운이네요’ 꾸벅 인사하시는데, 마치 <그녀는 버블티 가게에서 무얼 찾았을까?> 하는 공연 무대에 선 기분이었다.
책 놓인 작은 가게는 처음 본 사람, 다시 안 볼 사람에게 불현듯 속이야기를 툭 꺼내게 한다. 딱딱하게 느껴지던 이비인후과 원장 선생님 마우스 곁에서, 오래된 조립 PC를 들고 방문한 컴퓨터 업체 사장님 작업 테이블에서 눈에 익은 책을 발견할 때, 거창한 대화 없이도 마음이 열린다. (나만 그런가!^^)
또 다른 작은 이야기가 서운해하며 발 돌릴까 염려되는 사장은, 오늘도 요의와 허기는 의지력의 문제라며 초심을 꾸짖고 있다.
“힘들지 않으세요?”
가게를 운영하며 자주 들는 질문이다. 책 읽기 힘들지 않으세요? 가게 힘들지 않으세요? 두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
“재미있어요.”
재미있다. 책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대단한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저 글 읽기가 재미있어서 읽는다. 가게도 그렇다. 돈 계산은 작디작은 가게에 앉은 내게 매번 ‘대표님’ 호칭을 사용해 주시는, 사시사철 진지해서 귀여우신 세무사님께 부탁드리고 나는 책을 읽듯 가게의 작은 이야기들을 읽는다. 재미있어서. 초심은 내던지고 푹 빠져 읽는다.
왜 재미있냐물으시면무엇 때문인지 정확히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쓴다. 글이 좋고 글이 담긴 책을 사랑하고 책이 담긴 이곳이 재미있다.
선 넘는 무례한 토크, 카운터에 던져지는 카드가 나타나면 <곰씨의 의자>와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는다.